“정미는 순백으로 광택을 띠고 겨는 완전히 떨어져 나가 흡사 씻어낸 듯하다.”
일본 언론인 가세 와사부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 ‘타운센드 정미소’에서 찧은 쌀을 이렇게 묘사했다. 1892년 설립된 이 정미소는 증기 동력으로 작동하는 60마력짜리 엔진과 독일제 정미기 4대를 보유했다. 기계 한 대를 12시간 돌리면 현미 16석과 백미 8석을 얻을 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정미소의 역사를 담은 ‘정미소: 낟알에서 흰쌀까지’ 조사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 도정 방법과 변천, 근대 이후 등장한 정미소의 정착 과정 등을 담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미소는 19세기 말 일제가 값싼 조선미를 도정해 일본 현지로 수출하기 위해 도입됐다. 처음에는 인천, 전북 군산 등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생겼지만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마을이나 조합 단위로 돈을 모아 공동정미소를 설립할 정도로 필수시설이 되면서 1977년 정미소 수는 전국에 약 2만5000개에 달했다. 쌀뿐만 아니라 보리, 밀, 수수, 메밀 등 잡곡을 함께 취급하거나 떡을 만드는 방앗간 겸용 정미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양곡의 생산, 가공, 판매 등이 일괄적으로 이뤄지는 ‘미곡종합처리장’이 생기면서 도정만 담당하는 정미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996년 미곡종합처리장 수가 전국에 220여 곳으로 늘면서 정미소는 그해 1만1457곳으로 줄었다. 식생활의 서구화로 쌀 수요가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김옥천 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과거에는 정미소를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 종사자 수가 많았지만 정미업이 점차 사양산업이 되면서 정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며 “한국인의 ‘밥 문화’를 책임져 온 정미소의 원형에 대한 기록은 보존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보고서에는 옛 정미소 형태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운영되는 사례와 ‘쌀 편집숍’ 등 변화를 모색하는 사례 등도 담겼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