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지난해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주도한 ‘하마스 2인자’ 야히야 신와르(사진)로 추정되는 인물이 가자지구 지하 터널에서 탈출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13일 공개했다. CNN, AFP통신 등 서구 외신은 이 영상 속 인물이 신와르가 맞는지 검증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사실이라면 중동전쟁 발발 후 줄곧 은신하던 신와르의 행적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의 지상전을 개시할 때부터 ‘신와르 제거’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웠다. 최근 가자지구 남부 거점도시 라파 일대에서 지상전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을 우려하자 공격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와르 영상을 공개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공격 위험에 놓인 약 140만 명의 가자지구 남부 주민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상당수 주민이 집을 버리고 비교적 안전한 해안가 텐트촌으로 대피하려 하지만 현재 텐트 한 개 값이 1000달러(약 135만 원)로 치솟은 상태라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 이스라엘 “AI 기술로 신와르 확인”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이날 “신와르와 가족들이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인근 지하 터널에서 도망치는 장면”이라며 약 42초짜리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선 신와르의 남동생인 이브라힘이 손전등을 들고 앞서가고, 신와르의 아내와 세 자녀가 뒤를 따른다. 신와르는 왼손에 가방을 든 채 슬리퍼를 신고 맨 뒤에서 가족들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에는 신와르의 얼굴이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고 주로 뒷모습만 보인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영상 속 인물의 귀 크기 등으로 신와르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 터널이 하마스가 붙잡은 이스라엘 민간인 인질의 억류 장소와도 연결됐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이 영상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후 사흘 뒤인 지난해 10월 10일 칸유니스 동쪽의 한 묘지 아래 지하 터널에서 촬영됐다고 밝혔다. 해당 지역에서 작전 중인 이스라엘군이 회수한 터널 내부 감시 영상에서 이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군은 또한 신와르를 포함한 하마스 지도부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터널 내부 은신처를 찍은 영상도 공개했다. 화장실, 주방, 침실 공간 등은 물론 수백만 달러의 현금이 보관된 금고도 여럿 있었다. 하가리 대변인은 “하마스 고위 관리들은 편안한 환경에서 거주했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돈 이외의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반드시 신와르를 사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미 중앙정보국(CIA),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협상을 중재해 온 카타르 관리 등이 모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협상단이 귀국하며 사실상 아무 소득 없이 종료됐다. 특히 하마스가 붙잡은 이스라엘 인질과 이스라엘 감옥에 있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맞교환 비율 등에서 양측 이견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라파 주민, 필사의 자력 탈출 시도
라파 일대에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상당수 주민이 필사의 탈출 시도를 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3일 라파 임시 대피소에 거주하는 많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텐트를 해체하고 소지품을 모아 이동 중이라고 전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측에 전한 피란민 대피 계획과는 무관한 자력 탈출 행렬이다.
한 피란민은 “우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죽음은 이미 도처에 널려 있다”고 전했다. 라파 일대는 이미 가자지구 ‘최후의 피란처’였던 만큼 이곳을 벗어나도 마땅한 행선지가 없다는 것이다. 국제사회 또한 라파 주민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스라엘군이 지상전을 강화하면 안 된다며 거듭 공격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