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50)

  • 입력 1998년 6월 22일 20시 44분


부엌에서 나는 물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어머니는 방문을 굳게 닫은 채 말이 없었다. 나는 봉순이 언니가 김칫거리들을 절이는 동안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추석이 지날 무렵 우리집을 떠난 제비의 집이 처마밑에 조그맣게 남아 있었다. 지난 여름 내내 그곳에서 입술이 달걀 노른자위 처럼 말간 어린 제비들이 울던 조그만 제비집. 그리고 가을이 되었을 때 새끼들은 젊은 날개를 제 어미보다 활기차게 휘저으며 이곳을 떠났었다…. 한번 비워진 마음…. 내년 봄 저 제비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 마음은, 봉순이 언니에 대한 내 마음은 다시금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을까.

그날 오후 언니와 오빠가 학교에서 돌아와, 어어, 하고 놀라운 탄성을 질렀지만, 봉순이 언니는 또 내게 그랬듯이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을 뿐이었다. 우리식구들은 마치 나도 모르게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색한 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다른 식구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그리고 밤이 되자 어머니가 우리방으로 건너오셨다. 창호지 바른 문을 조용히 닫는 어머니의 얼굴은 아주 굳어 있었다. 그 서슬 때문이었는지 벌써 갈라진 손등에 글리세린을 바르던 봉순이 언니의 손이 잠시 멈추어 섰다. 어머니는 잠시 방안에 서 있다가 봉순이 언니 앞에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이마를 짚은 한손이 어머니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많은 생각끝에 이 방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봉순아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만에 하나 내가 묻는 말에 네가 거짓말을 하면 그때는 나도 널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거다, 알겠니?

어머니의 말은 추상적이었지만 아주 단호했고 엄숙했다. 봉순이 언니는 멈추었던 손을 다시 놀리며 손등에 글리세린을 다시 바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알았어?

―…예.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 어머니의 눈길이 이부자리에 누워 동화책을 읽고 있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어머니의 눈길에는 잠시였지만, 아이가 있는데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어쩌나 하는 갈등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예전처럼 설마, 저 어린아이가,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이제 방안에 있는 나를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몇달째냐?

어머니는 다짜고짜 물었다. 봉순이 언니는 고개를 숙인 채 기름이 다 먹은 손등만 문지르고 문질렀다.

공지영 글·오명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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