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게임 (43)

  • 입력 1998년 9월 6일 18시 52분


제2장 달의 잠행 (19)

다행히 여자는 제법 앞서 있었다. 나는 여자의 바로 앞으로 가서 차를 세우고 몸을 뻗어 문을 열었다. 여자는 빗줄기 사이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자기의 딸 얼굴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내던지듯이 차에 올랐다. 문을 탕 닫을 때, 남자가 차 뒤꽁무니를 잡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빗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휘어진 길에서 차가 풀로 덮인 갓길로 쏠려 한순간 미끄러지는 듯했으나 다행히 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는 숨을 몰아쉬며 젖은 몸에 젖은 치마를 힘들게 끼어 입었다. 나는 위에 걸쳐 입은 얇은 카디건을 서둘러 벗어 주고 한 손으로 티슈를 뽑아주었다. 여자가 티슈로 어깨의 상처를 누르고 말없이 옷을 받아 입었다. 살 냄새와 피 냄새가 한 순간 역겨웠지만 나는 지긋이 참아냈다. 여자의 눈밑이 이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여자의 발에 유리조각이 박혔는지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여행용 티슈를 주었다. 여자는 티슈를 손에 꽉 쥐고만 있을 뿐 더 이상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는 기차역이 있는 낯선 읍에 닿았다. 장이 선 날인지 비가 오는데도 거리가 붐볐다. 소를 끌고 우산을 든 노인들이 방심한 채 거리 한가운데 서 있곤 했다. 나는 모르는 마을들을 지나다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낯선 마을로 들어갔다. 으레 그런 것처럼 마을을 지나자 커다란 못이 나타났다.

빗방울이 물 위에 못을 박는 듯 아프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염소 울음소리가 애절하게 들렸다. 아이 둘은 뒷자리에서 서로 엉겨 붙어 따뜻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염소떼는 둑 위에 묶여 있었다. 묶인 것은 어미 염소들일 뿐 새끼 염소들은 비가 내리는 허황한 세계 위에 날려갈 것처럼 위태롭게 놓여 나 있었다. 어미 염소가 줄이 허용하는 반경 바깥을 향해 이리 저리 몸을 당겨 볼 때마다 새끼 염소 서너 마리씩이 조르르 뒤따르며 서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염소 귓속에 물이 들어가면 죽는다고 들었는데…. 주인이 새벽에 매어두고 깜박 잊은 것일까? 아니면 장에라도 나가 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시느라 아직 못 돌아오는 걸까? 휴게소 여자도 부어오르는 붉은 얼굴로 멍하니 염소떼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쪽 눈 밑이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여자는 어딘가에 통증이 오는 지 한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여자는 눈을 꼭 감더니 잠이라도 든 듯 고요했다.

나는 부희 생각을 했다. 열 아홉살에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낳기 위해 자신을 팔아 이 먼 시골로 와서 나이 든 농부의 아내로 살았던 여자. 그리고 13년이나 지난 뒤에 아이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 살을 섞는 죄를 지어 시아버지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던 여자.

아이란 그 아름다운 동화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폐시키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생에서 실종되는가. 실종 신고도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여기 있다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을까? 죄 짓지 않아야 했을까? 머릿속 어딘가에 고인 피가 넘어진 장롱처럼 생을 짓누를 때, 어떻게 빠져나갈 수가 있을까? 언제까지나 두 눈을 감고 잠자야 할까?

차라리 어딘가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지고 싶다. 그런 훼손만이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나비가 불을 향해 달려드는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연구해왔지만 아직은 밝히지 못했다고 한다. 때로 여자가 스스로 불행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규명을 했던가? 혹은 규명하려고 노력이라도 했던가? 나비에 대해서는 노력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경린 글·엄택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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