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15일 오전 11시반. 겨울 날씨 답지 않게 따스한 지중해의 햇살이 내리꽂히는 예루살렘의 다마스쿠스 게이트 앞에 대형버스와 승합차 모양의 소형버스 수백대가 속속 도착했다.
다마스쿠스 게이트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성지가 밀집한 예루살렘 구시가지, 즉 동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가장 큰 관문. 버스 행렬은 이슬람의 휴일인 금요일을 맞아 동예루살렘내 ‘성전산(Temple Mount)’의 알 아크사 사원에서 열리는 정오 기도에 참석하려는 모슬렘(이슬람 교도)들을 쏟아냈다.
이들과 섞여 다마스쿠스 게이트로 바쁜 발걸음을 놀리던 기자는 난데없는 함성에 깜짝 놀랐다. 다마스쿠스 게이트 앞 광장에 모인 수천명의 모슬렘이 출입구를 차단한 이스라엘 군경에게 고함과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방탄복과 M16 소총으로 무장한 군경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출입자의 신분증을 검사해 35세 이하의 팔레스타인 남자는 출입을 제지했다. 9월28일 이스라엘 리쿠드당의 아리엘 샤론 당수가 성전산을 찾은 뒤 팔레스타인 유혈시위가 발발하자 엄격한 출입제한이 시작됐다. 출입이 거부된 청년과 아이들의 쇳소리같은 야유가 점점 커지고, 이스라엘 군경의 눈빛도 번뜩였다.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라도 날아들면 금방이라도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13억 이슬람과의 대화 |
- 증오의 겨울속 희망의 봄 준비 - 긴장의 예루살렘에 화해 물결 |
겨우 다마스쿠스 게이트로 들어선 기자는 인파에 밀리다시피 하며 동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성전산에는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너무 위험하다”며 막았다.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Wailing Wall)’ 주변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온통 검은 옷과 모자 차림의 유대교인 수백명이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기도문을 외우고 있고 그 뒤를 소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경이 둘러싸고 있었다. 군인 중 한 명이 “지난주 통곡의 벽 바로 위에 있는 알 아크사 사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돌을 던져 유대인들이 많이 다쳤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었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슬픔의 길)’나 예수가 부활한 장소에 세워졌다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도 쓸쓸했다. 예년 같으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성지 순례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텐데. 1㎢ 남짓한 이 곳에 어떻게 전세계 17억 기독교인과 13억 모슬렘, 2000만 유대교인의 성지가 모두 들어설 수 있었을까. 어쨌든 현재의 동예루살렘은 이질적인 문명이 부닥치는 최전선이었다.
다음날인 16일 찾아간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치하의 요르단강 서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역시 출입자 단속이 엄격했다. 전날 요르단강 서안 내의 나블루스에서 벌어진 시위로 팔레스타인인 6명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베들레헴에서 선교활동중인 강태윤(姜泰允·42)선교사가 마중 나오지 않았다면 기자는 베들레헴에도 들어가지 못할 뻔했다. 강 선교사는 베들레헴에서 12년째 유치원과 한국문화원을 운영하며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다.
아기예수 탄생 2000년을 맞은 베들레헴은 ‘평화’나 ‘축복’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다닥다닥 붙은 잿빛 집들과 지붕마다 설치된 저수통이 베들레헴 사람들의 옹색한 삶을 대변했다. 저수통은 이스라엘 당국이 식수 공급을 2, 3주에 한번씩 하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라고 강선교사는 설명했다. 그가 운영하는 유치원에도 비상시에 대비, 물이 담긴 수백개의 페트병이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면 전기마저 끊긴다. 주민들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인근의 팔레스타인 도시 벳잘라와 유대인 정착촌 질로 사이에서 오가는 ‘총격전의 불꽃놀이’를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한다. 가끔 베들레헴 쪽으로 총탄이 날아오기도 해 주민들은 두달 가까이 한밤중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깨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한나 나세르 베들레헴 시장(62)은 “내 손자를 포함해 베들레헴 어린이들 대부분이 불면증 등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강선교사도 “긴장과 공포가 두달째 계속되니까 마치 가슴 속에 뭔가 묵직한 게 들어 있는 느낌”이라고 호소했다.
유대교의 나라에 속한 기독교의 성지에서 대부분 모슬렘인 아랍인들이 질곡의 삶을 사는, 이 기묘한 퓨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문명 사이의 화해와 대화의 단초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처럼 문명이 충돌하는 곳에서부터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들레헴에서 만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직도 늦지 않았다”며 평화를 갈구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를 추진하는 학생운동이 봇물처럼 번지고 있었다. ‘네베샬롬(평화마을)’이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공동체도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조금씩 조금씩 화해의 싹을 키우고 있다.
어느새 어두워진 베들레헴의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2000년 전 동방박사의 길잡이가 됐을 법한 별이.
<예루살렘·베들레헴〓박제균기자>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