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교수의 희망열기]자결권 지키는 민족만 큰다

  • 입력 2001년 1월 7일 19시 11분


철이 들면서부터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우리 국토인 한반도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어 국가다운 구실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외교통상부를 대표하는 사람이 한반도의 장래는 주변 4강 국가들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처신에 한계가 있다고 말해 우리 처지를 민망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일본인들이 그런 사고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책을 읽다가 그 생각이 타당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토인비에 따르면 어떤 민족이나 사회는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그 도전에 응전할 수 있어야 자기발전과 도약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무런 도전도 받은 바 없는 민족은 성장도 늦어지고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뒤진다는 것이다.

▼4강 틈바구니 되레 좋은 환경▼

우리 민족이 태평양의 어떤 섬나라나 동남아시아의 변방국가로 머물렀다면 오늘과 같은 성장과 발전이 가능했겠는가. 해방과 더불어 겪은 시련과 도전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경제발전도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가 적어도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통해 문화적 통일성을 지키면서 발전해 온 것은 오히려 열강들 사이에서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생각을 연장시켜 보자.

과거에는 군사력이 점령과 지배의 역사를 주관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군사력보다는 정치적 균형 유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는 정치력보다는 경제적 역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후반부터는 문화적 활동이 점차 국제무대에 비중 있게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한반도가 일본과 대륙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정학적으로 보았을 때도 더 감사해야 할 행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통일 후의 한국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지정학적인 자연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떤 국가적 삶을 영위해 가는가 하는 데 있다. 토인비는 그것을 민족의 자기결정권 행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로마는 군사력보다도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적 자기결정권이 붕괴되면서 멸망의 비운을 맞았다. 몇해 전에는 세계 초강국으로 자처하던 소련이 체제붕괴의 비운을 겪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인구를 갖고 있었지만 자기결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임진왜란 때 조정의 분열이 일본의 침략을 불러들였다. 한말의 왕정이 대외적인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침략을 방어할 방도가 없었다. 큰 나라도 자기 결정권을 상실하면 위기를 자초하는 법이며 작은 국가라도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동안은 발전을 거듭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파싸움이 왕실의 결정권을 마비시켰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에는 정쟁(政爭)이 국가발전을 저해시켰다. 오늘날에는 여야의 목적을 상실한 대립과 싸움이 사회적 발전을 병들게 하고 있다.

▼미래지향적 가치관이 주춧돌▼

노사분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기업체가 대외적으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것은 부모가 싸우면 가정이 제구실을 못하며 자녀들은 불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회가 대립과 갈등을 겪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 대립에 의한 자기 지양(止揚)의 지혜와 용기를 갖추지 못하면 정체와 퇴락을 모면할 길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이 자기결정권을 지탱해 주는 추진력은 무엇인가. 겉으로 나타나는 바는 법과 질서다. 그러나 그 근저에 있는 것은 강한 정신력으로서의 도덕성이다. 도덕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이 소아(小我)를 버리고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갖출 때 모든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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