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 회사를 이전하려고 강남 일대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깔끔하고 가격도 저렴한 사무실이 눈에 띄어 주인을 찾았다. 깐깐하고 고집이 세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관리인이었다. 한참 입주조건을 묻는 차에 그가 대뜸 “그런데 벤처는 아니겠지?”라고 물었다. “아니, 벤처가 어때서요?”라고 반문하자 “거, 벤처한다는 사람들은 피곤해. 야근한다고 밤새 들락거리지, 사무실도 지저분하게 쓰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벤처기업의 인기가 바닥까지 떨어졌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벤처기업인을 최고의 신랑감으로 치고, 심지어 벤처기업이라면 술값이나 사무실 임대료까지 주식으로 요구한다는게 불과 몇 달전 아니었던가.
무엇이 벤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떤 이는 기업의 가치는 무시한 채 ‘돈놓고 돈먹기’식이었던 벤처투자가 거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내 벤처기업의 상당수가 뛰어난 기술력 보다는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어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분석도 있다. 냄비처럼 쉽게 끓고 식어버리는 국민성과 잘못된 정부정책이 한몫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두 고개가 끄떡여지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러한 설명만으론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다. 혹시 남의 잘못만이 아닌 우리 내부의 문제는 없었을까.
직업상 수많은 벤처기업인을 만나는 나에게 한동안 ‘벤처’는 ‘열정’이란 말과 동의어였다. 모든게 부족하고 가끔 성공이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형형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의 순수함이 가슴을 달뜨게 했다.
그러나 작년을 전후로 겪은 몇몇 불유쾌한 경험들은 ‘벤처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갖게 했다. 재벌기업의 모순을 욕하면서도 슬그머니 그들을 닮아버린 벤처인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유명 벤처기업에 다니던 한 후배는 30대의 젊은 사장이 직원을 ‘하인’부리듯 대하는 모습에 실망, 회사를 그만 두었다. 사장의 경영방식이나 돈 씀씀이가 대기업인지, 벤처인지를 헷갈리게 만들더라는 것이 그의 고백. 코스닥 등록을 전후로 우리사주의 배정가격과 물량을 놓고 임직원간에 갈등이 일어나 내홍을 겪는 회사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벤처열풍에 힘입어 지난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던 회사중 상당수는 봄볕을 쬐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자금부족을 겪었기 때문이지만 내부갈등도 큰 역할을 했다. 성공의 과실만으로 기대했지, 창업의 철학과 합리적인 비전이 없는 구성원들은 차가운 바람에 쉽게 무너졌다.
이렇게 ‘벤처답지 못한 벤처의 기업문화’가 벤처를 스스로 붕괴시킨 내부요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철야근무의 열정’이 고지식한 노인네의 눈에는 ‘생활이 야행성으로 변해 건강마저 해치는 젊은이들의 무절제함’으로 비쳐진 것은 아닐까.
올해 테헤란밸리의 경영화두로 ‘선택과 집중’ ‘수익모델의 개발’ 등 다양한 테마가 제시되고 있다. 이런 것들도 좋지만 나는 경영계획의 말미에 ‘벤처다운 기업문화의 회복’을 한줄 덧붙이고 싶다.
그럼 ‘벤처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회사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 시퍼렇게 날선 칼날 같은 순수함과 열정을 간직했던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서로 신뢰하며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공평히 나눠갖고, 세상이 알아주고 세상을 바꾸는 회사를 만들자던 그 마음, 불가능해보이는 것일지라도 한번 도전해보는 ‘승부근성’과 ‘야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벤처’란 말 자체가 모든 것이 없는 상태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자는 ‘도전’의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마음 먹으면 편하고 용기가 더욱 날 것 같다.
<이영훈 약력>
-현 마이스터컨설팅 수석 컨설턴트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전 KTB네트워크 벤처지원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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