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부터 지금까지 이 법치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조적인 장면 둘을 거슬러 더듬어보자. 정부와 여당은 새해를 맞기 전에 심기일전을 다짐하며 당 대표를 교체했다. 그리고 마치 소리없이 야반도주하듯 민주당 의원 3명이 당적을 옮김으로써 자민련과의 공조 재건을 도모했다. 교묘한 당적변경은 날치기로 국회법을 개정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자랑스러워하는 듯하다. 기상천외의 교섭단체 만들기 작전은 법률상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마치 그동안 수가 부족해서 개혁법안을 처리하지 못했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폭설도 덮지 못한 '인권의 외침'▼
그 결과는 매양 그렇듯 난장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치자금’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한나라당까지 예의 정치보복을 주장하며 검찰수사를 거부하고 나섰다. 헌법으로 신분보장을 받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가진 자들이 법치주의의 마당에서 보여주는 한바탕 소란이다.
인권운동단체 활동가들이 담요와 침낭을 명동으로 옮긴 것은 지난해 12월 28일이다. 국가보안법 개폐와 실효성 있는 인권위원회 설치가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한 항의의 표시를 단식농성으로 결정했다. 그나마 성당측에서도 반대해 천막도 없이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 닷새 뒤 눈이 내리자 할 수 없이 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할 얇은 천막을 하나 쳤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을 웅크린 채 지새우고, 아침이면 다시 계단에 앉았다. 매일 오후 2시와 8시에 행사를 열고, 다시 천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회의를 통해 전열을 정비했다.
한겨울의 단식, 그것도 노상에서 시작한 행동은 쉽지 않았다. 며칠 되지 않아 탈수증세로 응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이 생겼다. 다시 폭설이 덮치자 동요도 일었다. 그러나 실려나간 사람의 자리는 더 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메워졌다. 지지 방문과 동조단식이 끊이질 않았다.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한 단체에서는 매일 이어달리기식으로 함께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도 눈을 맞으며 새로운 행동을 다짐했다.
노상 단식농성은 9일까지 13일간 계속됐다. 9일이 임시국회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행동은 국회와 정치에 대한 분노의 함성이자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인권운동가들도 한때는 정치권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사실이다. 세월만 흐른 게 아니라 정권까지 바뀌었으므로, 이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악법을 폐지하고 필요한 법을 제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하여 세련된 모습을 흉내내며 아침저녁으로 정치인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협상과 로비가 행동과 구호보다 효율성은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해를 넘기고, 정기국회와 임시국회가 모두 끝나도 목표의 마지막 지점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정치인들의 환멸스러운 행동에 운동가들의 절박한 행동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일부에선 겨울의 노상 단식농성을 무모할 뿐만 아니라 불법한 행위로 평가절하하려 한다. 그러나 준법이란 법의 내용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환경적 신뢰가 전제돼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 합법의 울타리 안에서 참고 기다리라는 건 법치주의의 덕목 목록에 없다. 그리고 불복종 운동은 불법과 근본적으로 성질을 달리 한다. 법을 준수할 전제적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경우, 개혁의 목표를 위한 유효적절한 수단의 하나가 불복종이다. 불복종을 불법시하는 시민운동은 죽은 운동이나 다름없다.
▼불복종과 불법은 다르다▼
국가보안법은 시대착오적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에 의한 전쟁을 즐기는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므로 버려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간의 본래적 가치와 본성의 유지에 역행하는 유린행위를 처벌하고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가져야 옳다.
인간들을 서로 구별하게 해주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이 있다. 거친 눈발 속에서 권력의 폭력을 막기 위해 비폭력적 행동을 종료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우리 마음의 평화상이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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