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알았다. 노래방 가기를 즐기고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힘찬 카타르시스와 우정 공동체의 재확인으로 알고 사는 사람의 한편에서는 노래방에서 은근히 조장되는 우정의 폭력 문화에 고통을 느끼는 말 못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는 것을.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노래방 문화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정치, 사회, 경제, 언론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가치를 확보하고 살아가야 할 문화나 창작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노래방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 성공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의 개성과 목소리를 지켜내려는 인디 문인이나 인디 학자들이 아니고 무언가 권력을 가진 남의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것에서 이윤을 찾아 연명해 가는 ‘브로커 문화인’들이 될 것이다.
가령 문학이나 학문의 영역에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몸 담론’ ‘섹슈얼리티 담론’ ‘동아시아 담론’ ‘근대성 담론’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모두 다 그것에 열렬히 집중했다. 그동안 지배문화의 헤게모니에 의해 경시됐던 한 분야에 조명을 비춰 집중적으로 연구 내지 탐색한다는 점에서야 나쁠 것은 없지만 오직 그것만 생산되고 그것만 형상화되고 그것에만 가담해야 평단의 관심을 받는대서야 너무 소비적이고 단세포적이고 가난하고 알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제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가진 작품들은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기가 어렵게 됐다. 물론 거대 담론이 문학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지만 “그 사람 아직도 거대담론이데…”하는 것이 곧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 가치 평가가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인 이상 어떤 시대에도 사회적 비판의 자세를 포기한 문학이란 플라스틱 꽃의 생명밖에는 가질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모두 포스트모더니스트이고 근대성에 의해 구속받아온 몸과 섹슈얼리티의 복권주의자이더니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도 페미니즘도 몸담론도 시들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어느 시대에도 부담없는 서정적 연시만 계속 평단이나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 비판이나 관심을 가진 텍스트는 이제 제일 인기 없는, 덜 떨어진, 시대착오의 품목으로 폐기되고 만 것이다.
유행의 물결이 한번 시작되면 정말로 들불처럼 그것에 관한 관심이 일고 들불이 휩쓸고 간 자리에 폐허만 남듯 그 외의 작은 목소리들은 언급도 되지 않고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이 노래방 문화의 진정한 심각성이다. 그리하여 모두들 결사적으로 거기에 끼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저널이나 평단의 관심이 온통 그곳으로 쏠리고 힘을 가진 저널들이 집단적 반복적으로 그것을 자꾸 언급하고 또 그런 비평의 틀 안에서 한번 언급된 시인이나 작가들만 계속 언급하는 조명의 확대 재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에 한번 거기서 빠지면 영원히 소외된다는 가난한 절박감이 일시에 전염병처럼 문화계를 휩쓸어 간다. 그런 테두리 안에서 살다 보면 우리는 모두 독립적이고도 매력적인 인디의 존재가 되지 못하고 한낱 브로커가 되어 권력자의 일을 해준 대가로 이문이나 뜯어먹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노래방 문화 속에서는 언제나 내 위에 누가 있고 내 뒤에 누가 있고 주변에 누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연방 내 위나 뒤를 신경쓰며 살아가느라 우리는 너절한 브로커로서 살아갈 뿐 진정한 의미에서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개성을 계속 고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 함께 유행가나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몹시도 사이좋게 우리 문화는 하향 평준화될 것이다. 그러면서 안심하여 말할 것이다. 얘도 쟤도 걔도 다 별 것 아니라고.
그러는 사이 우리 문화에서는 앨런 긴즈버그도, 구로사와 아키라도, 이상도, 김수영도, 카프카도 다 숨을 거두고 모두들 어떤 집단 패거리의 도토리만한 브로커들만 남게 될 것이다.
김승희 <서강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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