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운명처럼 옛 사랑과 해후하거나 여행중에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 관계를 갖는다. 사랑이나 도덕은 따지지 않는다. 욕망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뿐. 결혼 제도란 억압일 뿐임을 깨닫는다. 요즘 여성작가들이 쓴 소설들은 대부분 이같은 줄거리로 꾸며진다.
얼마전 선을 보인 고은주의 장편소설 ‘여자의 계절’도 그같은 예.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 단짝이었던 30대 여성 네 명이 고백한 10년간의 성 체험 고백기에는 다양한 혼외정사와 성적 관능이 파격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주제도, 주인공 미류의 말처럼 ‘저질러 봐, 그럼 세상이 달라질 테니까’다.
90년대 페미니즘 붐을 문학적으로 변용한 ‘불륜소설’이 최근 줄을 잇고 있다. ‘여성소설의 통속화’라 할 만한 이런 경향에 대해 문단의 근심은 깊다. 문학평론가 박혜경씨는 “이들 소설이 결혼제도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의 탈출 욕구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불륜 자체에 탐닉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들 작품들의 스타일도 점차 정형화되는 추세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대부분의 남자는 내적인 고민이 없는 머리가 텅빈 로봇이며, 여자는 온갖 존재론적 고뇌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지는 도식적인 대립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꼬집는다.
속되게 말한다면, 남자가 하면 ‘스캔들’이고, 여자가 하면 ‘존재론적 로맨스’인 것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를 본능에 지배받는 동물적 존재로 그린 배수아의 최근작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이다.
문학평론가 권성우씨는 “같은 불륜 문제를 다루더라도 성과 관련된 현대성의 문제를 섬뜩하게 그리거나, 욕망을 극단으로 밀고가거나,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같은 자기확장 노력이 부족해보여 아쉽다”고 말한다.
비슷비슷한 불륜소설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은 점점 냉담해지고 있다. 90년대 중반 공지영 은희경의 여성소설이 10만부가 넘게 팔린 적이 있지만 요즘은 판매량이 1만부를 넘기기가 어려운 것.
장은수씨는 “작품의 수준도 문제겠지만 원조교제 스와핑(부부교환) 같은 충격적인 성 세태에서 ‘자유연애’란 구호가 별다른 설득력을 얻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여성소설이 이같은 스스로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 소수를 상대로한 ‘주부용 하이틴 로맨스’로 격하될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