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테마무비]성경을 읽어주는 영화

  • 입력 2001년 1월 25일 16시 00분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속 대사라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등장인물이 폼 잡고 무언가를 인용했을 때, 인용 구절이 권위 있는 그 무엇일 때, 그 대사들은 좀더 긴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일까? 시나리오 작가들은 성경책을 샅샅이 뒤져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구절을 찾아낼 때가 많았다.

먼저 성경책 한 권을 통째로 인용한 영화가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지만 이탈리아 좌파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연출한 <마태복음>(64)만큼 성경을 통째로 인용한 경우는 드물다. 이 영화의 모든 대사는 신약성경 4복음서 중 첫 번째인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 그대로다. 파졸리니 감독은 2시간17분이라는 만만치 않은 러닝타임을 시적인 이미지와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예수의 메시지만으로 채워 넣었다. 그가 그린 예수는 신이라기보다 민중지도자 혹은 노동자 이미지에 가깝다(http://thesync.com/features에 가면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성경구절을 인용하기 위해 굳이 성서적 소재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폭력이 난무하고 피가 튀는 <펄프 픽션>에도 성경구절이 보란 듯이 등장한다. 음울한 킬러 줄스(사무엘 잭슨)가 읊조리는 성경의 한 구절. 벌벌 떠는 적 앞에서 줄스는 "이 상황에 딱 어울리는 성경구절이 있지"라며 구약성서 에스겔 25장 17절을 암송한다.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로저 코먼은 '투시력'이라는 선정적 소재를 이용해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B급 SF 영화 이 바로 그것. 투시력 안약을 개발한 제임스 박사는 자기 자신에게 약을 실험하고 곧 딜레마에 빠진다. 그는 표면은 보지 못한 채 내부만 보게 되었으며 눈은 마치 괴물처럼 벌개진다. 결국 그는 스스로 눈을 찌르며 자학하고 이때 자막으로 마태복음 5장 29절 말씀이 흐른다. "만일 네 오른 쪽 눈이 너를 실족케(너로 하여금 나쁜 쪽으로 가게) 하거든 빼어 내던지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아, 정말 찌릿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미션>의 마지막 장면도 성경구절이다. 유럽의 식민정책에 희생되어 무신론자들의 영토로 편입된 과라니 족. 그들은 포르투갈 군대에 맨몸으로 맞서지만 몰살당한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는데 과라니 족의 어린아이들은 배를 저으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5절 말씀이 자막으로 뜬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한국에선 흐뭇한 홈 드라마로 오해되기 일쑤지만 알고보면 레즈비언에 관한 아름다운 회고담인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도 성경을 인용한다. 다소 남성적인 잇지와 여린 여자 루스. 루스는 잇지에게 조금씩 기대게 되고 그들은 휘슬 스톱 카페에서 특별요리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요리를 하며 함께 살아간다. 그들이 '결합'하게 된 계기는 루스가 잇지에게 보낸 쪽지 한 장. 남편에게 흠씬 얻어맞은 루스는 잇지에게 룻기(구약성서 룻의 철자는 Ruth, 바로 '루스'다) 1장 16절을 적어보낸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곤경에 처한 루스는 성경구절을 빌어 무조건 잇지를 따르겠다는 서약을 한다.

그밖에 한국영화에도 심심찮게 성경구절이 등장한다. <매춘>의 첫 장면. "사는 놈이 있으니까 파는 년이 있지!"라는 대사는 요한복음 8장 7절을 인용한 것이다. <삼인조>의 이경영도 탐욕스러운 전당포 주인에게 마치 도시의 선지자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5장 7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최근 한국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성경 말씀은 역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대사다. 주먹질과 패싸움과 욕지거리로 도배된 이 영화의 결말은 의외로 교훈적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나이다." 구약성서 예레미아 10장 23절 말씀이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 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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