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테마무비]추락하는 것엔 의미가 있다

  • 입력 2001년 1월 28일 17시 51분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물리학적으로는 중력을 이기지 못한 사물의 운동이겠지만 일단 카메라가 '추락하는 것'을 뷰파인더 안에 잡으면 그것은 의미심장하거나 미스터리한 '사건'이 된다.

가장 신비로운 '추락 이미지' 중 하나는 번지점프다. 떨어지긴 하지만 바닥에 닿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허공 속으로 뛰어든다. <파리의 늑대인간>(An American Werewolf in Paris, 97)의 장난기 가득한 미국인 관광객들도 그들 중 하나다. 한밤중 에펠탑에서 떨어지는 기분은 어떨까?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추락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아뿔싸! 그녀에겐 줄이 없었고 그들은 뒤늦게 뛰어내려 그녀를 죽음에서 건진다(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파리의 늑대인간>의 추락은 남녀 주인공의 낭만적 결속을 드러내는데 마지막 그들은 결혼기념 번지점프를 하며 영화를 끝맺는다.

<번지점프를 하다>(2001)는 제목에서부터 강한 추락의 냄새를 풍긴다. 수많은 비밀과 소문 속에서 개봉(2월3일)을 기다리고 있는 이 영화의 번지점프 의미는 '운명'이다. 첫사랑의 날카로운 입맞춤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 앞에 '영혼의 파트너'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럽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들은 번지점프로 사랑을 이루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건 아직 개봉 전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화 보는 재미를 빼앗고 싶진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아직까지는 괜찮아…." <증오>(La Haine, 95)의 프랑스 외곽에 사는 '양아치'들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간다. 밥 말리의 레게 음악과 화염병, 진압경찰로 시작하는 <증오>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 그건 바로 지구를 향해 떨어지면서도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느낌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리쎌 웨폰>(Lethal Weapon, 87)의 미치광이 형사는 차라리 속 편한 '추락자'다. 마약 기운에 절어있는 한 여자가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며 시작되는 <리쎌 웨폰>의 추락장면은 광기의 이미지다. 범인보다 더 미쳐 있는 '광인 경찰' 멜 깁슨은 고층건물 위에서 시위하고 있는 범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그리곤 "차라리 같이 떨어져 버리자"며 범인을 안고 투신한다. 안전장치가 있어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너무 놀란 범인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며 항의한다.

한국영화의 추락 이미지는 <바보들의 행진>(75)에서 시작되는데 '하얀 고래 한 마리'를 잡으려 떠났던 한 젊은이는 '박통 시대'의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벼랑 밑으로 몸을 던진다. <바보선언>(84) 첫 장면에 등장하는 영화감독(이장호 감독이 직접 출연)은 어떤가? 활동사진의 실종위기를 맞은 80년대, 그는 옥상 위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칠수와 만수>(89)의 만수도 시대의 억압에 못이겨 추락을 택했던 사내다. 옥상 위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그들을 사회 불순 세력으로 오인한 경찰은 기어이 만수를 빌딩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렇게 보면 <개 같은 날의 오후>(95) 마지막 장면에서 손을 잡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던 그녀들의 굳센 연대감은 꽤 희망적이다. 이쯤에서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91)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날 테지만, 그들은 추락했다기보다 차라리 승천한 게 아닐까 싶다.

반드시 사람들만 떨어지는 건 아니다. <부시맨>(Gods must be Crazy)의 콜라 병 하나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시암썬셋>(Siam Sunset, 99)의 공중에서 떨어진 냉장고는 한 남자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98) 도입부에서 떨어진 조명기는 트루먼이 살고 있는 세계가 모두 가짜임을 희미하게 나마 암시해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떨어지는 사물'은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 91)의 리버 피닉스 기억 속에 있던 집 한 채. 언제나 떠돌며 갑자기 길 위에 잠들어 버리는 '기면발작증' 환자 피닉스에게 공중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집에 대한 기억은 찾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다.

수많은 추락의 이미지가 있지만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 58)만큼 아득한 심연을 연상케하는 영화도 드물다. 고소공포증, 악몽, 강박관념, 욕망, 죄의식, 그리고 종탑에서의 투신. 한참 전성기에 있던 히치콕은 이 영화에서 이 모든 것을 완벽한 순환구조에 몰아넣고 냉전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주의로 가득 찼던 당대 미국사회를 수수께끼 같은 영화 한 편으로 빚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남자는 여자를 구하는 데 또 다시 실패하고 주디/마들렌은 저 아래로 떨어진다. 아마도 그는 오늘밤 또 다시 악몽에 시달리며 추락의 이미지들로 가위눌릴 것이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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