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쿠우스' 여배우 첫 정신과 의사역 박정자

  • 입력 2001년 2월 5일 19시 00분


4년만에 다시 찾아온 연극 ‘에쿠우스’. 75년 ‘실험극장’(대표 이한승) 개관 기념으로 국내 초연된 이 작품은 최초로 관객 1만명 돌파와 6개월 장기공연 등 연극계 신기록의 산실이었다. 강태기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 등 이 작품에서 앨런 역을 맡은 연기자들은 스타로 부상했다.

9일 시작되는 2001년 ‘에쿠우스’는 중견배우 박정자(60)가 여성 연기자로는 최초로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역을 맡았다. 이 역은 지금까지 남자배우가 맡아왔는데 박정자가 어떻게 이 역을 소화해낼지 궁금하다.

# 박정자Ⅰ―무대 밖

“중성적 이미지의 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저는 그 표현이 좋습니다. 그림 그리기에 따라 다양한 얼굴이 가능하다는 것은 배우에겐 최대의 찬사이지요.”

그는 ‘여성’ 다이사트에 쏠린 관심에 이렇게 답변했다.

연극 에쿠우스는 피터 쉐퍼 원작으로 제목은 라틴어로 말(馬)이라는 뜻. 이 작품은 마굿간에서 여자 친구와 동침한 뒤 이를 지켜본 말의 눈을 잇따라 쇠꼬챙이로 찌른 16세 소년 앨런을 치료하는 다이사트를 통해 현대 문명과 종교에 상처받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박정자는 “30여년간 연기생활을 하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배우로서 ‘끝장’이라고 생각해 왔다”면서 “다이사트를 맡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 덥석 다이사트를 ‘물었다’”고 말했다.

꼬챙이로 말을 찌른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엽기 코드일까.

“다이사트는 앨런을 치료하면서 결국 스스로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관음증과 정신적 상처죠. 연습 중 이 장면에서 자꾸 눈물이 났는 데 걱정입니다.”

# 박정자Ⅱ―무대 위

연기경력 38년째인 그는 예술의 전당에 마련된 연습장에 들어서면서 “무대는 나의 지옥이자 천당”이라고 말했다. 무대에 서면 공포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무대안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무대의 냄새와 공기는 물론 휴식 중 배를 채우려고 둔, 정(情)이란 글씨가 박힌 초코파이까지.

연습이 시작되자 박정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이사트가 나타난다.

“심호흡을 크게 해봐. 그래, 들이쉬고 내쉬고. 내가 고쳐줄께.” 다이사트가 쇼크 상태에 있는 앨런(최광일)을 뒤에서 안은 채 달래며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지난해 11월말 연습을 시작한 뒤 체중계의 바늘이 세 눈금이나 내려갔다.

“아직 관객의 기(氣)를 제대로 못 만나 그렇습니다. 배우가 관객에게 기를 불어넣고, 관객들은 그 기를 돌려주고. 이런 피드백이 없으면 배우는 쓰러집니다.저는 공연 2시간10분 내내빠짐없이 등장하지만 관객의 눈길만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 박정자Ⅲ―주변

3월12일 60세 생일을 맞는 그는 연극 밖에서도 정신과 의사였다.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지만 지난달 31일 ‘말’들을 위한 회식을 마련했다. 말로 출연 중인 후배들이 그를 너무 어려워하는 데다 강행군에 다들 체중이 빠져 ‘야윈 말’이 됐기 때문이다.

연출자 한태숙은 “남성 연기자를 찾다 포기한 순간 박정자 선배의 배우로서의 무게와 중성적 이미지가 떠올랐다”며 “‘박정자의 다이사트’야말로 이전 ‘에쿠우스’와 차별성을 보여줄 가장 큰 승부수”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개설된 박정자의 인터넷 홈페이지(www.parkjungja.com) 프롤로그.

“쉰 아홉에 홈페이지를 만드는 사람이 있을까? 또 그건 나의 연극적 이념과 규칙에 합당한 걸까? 이 즐거운 의구심과 뜻밖의 통로 가운데서 저는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공연은 3월4일까지 화 목 금 오후 7시반, 수·주말 오후 3시 7시반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1만2000∼5만원. 02―764―5262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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