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 ‘자이니치(在日)’라고 하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본에서 ‘자이니치(在日)’라는 말은, ‘재일 조선인’(일본에서 한국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을 제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조선 조선인이라고 쓰기로 한다)을 가리키는 뜻으로만 쓰인다.
‘자이니치’란 말 속에는 재일 조선인의 아이덴티티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일찍이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일본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차별과 억압의 구조, 그리고 남북의 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농후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같은 역사의 아픔과 피곤함을 겪으면서 그들이 터득한 것이 바로 ‘자이니치(在日)를 살아간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조선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터티는 결코 잃지 않으면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일본 사회의 차별과 억압의 구조를 타파하고, 남북의 정치적 대립도 훌쩍 뛰어 넘겠다는 다부진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한반도에서 태어난 ‘1세’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뜨거나 고령이어서, 일본에서 나고 자란 ‘2세’, ‘3세’가 재일 조선인의 주력을 이루게 되었다. 덩달아 그들의 아이덴터티도 휘청거리고 있다.
‘2세’ 이후의 교포들은 대부분 우리말을 할 수 없는데다 젊은 교포의 상당수는 한반도에 아무 감정적인 끌림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이니치’의 아이덴터티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가. 일본도, ‘조국’도 아닌,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는 걸까.
최근에 나온 이 책은 ‘재일 조선인’의 아이덴터티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날카롭게 파헤쳤다. 이제 더 이상 ‘자이니치’는 ‘조국’ ‘국적’ ‘국민’에 주체성을 맡길 수 없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조국’ ‘국적’ ‘국민’ 등의 존재는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지만, 그 내실은 매우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자이니치’는 너무도 뼈저리게 실감했다는 것이다.
이 50여년 동안 일본과 한반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온 ‘자이니치’들은, 이러한 폭력에 휘말려 너무도 큰 희생을 치러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민족 의식을 완전히 내동댕이친다는 것은 아니다. ‘자이니치’가 일본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힘겹게 짊어진 존재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일본과의 관계만이 ‘자이니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이니치’ 문제는 앞으로 한국 사회에 대단히 심각한 여러 가지 의문들을 제기할 것이다. 이같은 ‘자이니치’의 목소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 ‘자이니치’ 문제에도 눈을 떠야 할 때다.
이연숙(히토츠바시대 교수·언어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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