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의사의 진단서만 있으면 대체로 피해 사실을 인정해 오던 법원이 ‘만약 의사가 의학적 근거 없이 피해자의 말만 믿고 상해진단서를 발급했다면 사고의 크기와 치료 후 신체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 이와 함께 ‘꾀병’을 부린 피해자와 그 과정에 개입된 의사 모두 사기범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도 열어놓았다.
이는 단순 접촉사고라도 가해자가 음주나 무면허, 뺑소니 등의 약점이 있을 경우 피해자가 다친 것으로 위장, 합의금을 갈취해 온 행태를 법원이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주지법 정읍지원 노수환(盧壽煥)판사는 15일 김모씨(25)가 운전하는 택시와 가벼운 접촉사고를 낸 뒤 뺑소니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모씨(45·여)에 대해 “의사의 상해진단서가 몸이 아프다는 김씨의 말만 믿고 발급된 데다 사고 크기 등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김씨가 상해를 입었다고 볼 수 없다”며 ‘뺑소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뺑소니’란 ‘상해(傷害)’와 ‘도주(逃走)’의 두 가지 요건이 모두 필요한 범죄로 피해자의 ‘인적 피해’가 필수적이다.
노판사는 그 대신 “택시운전사 김씨가 허위로 전치 3주의 상해진단서와 입원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며 “김씨와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 황모씨에 대해 사기 및 공갈 등 혐의로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법원이 뺑소니 사고에 대해 “상해진단서가 있지만 구호의무를 필요로 할 만큼 큰 상처가 아니다”며 무죄를 내린 적은 간간이 있었지만 상해진단서의 신빙성에 대해 직접 의문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
노판사는 판결문에서 “방사선 및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김씨가 상해를 입었다고 볼 만한 소견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차량의 파손상태가 페인트칠만 약간 벗겨질 정도였으며 뒤늦게 아프다고 주장한 점 등으로 볼 때 상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노판사는 김씨가 제출한 진단서와 방사선 촬영사진 등을 초진의사 황씨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 조회, “상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소견서를 받아 이 같은 판결에 이르렀다.
노판사는 그러나 전씨가 면허정지기간 중 술을 마시고 운전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노판사는 이와 관련, “교통사고를 낸 사람이 형사처벌 대상자일 경우 피해자들이 허위로 상해를 가장해 합의금을 뜯어내거나 보험금을 청구하는 행태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며 “피해자가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일도 없어야 하지만 가해자가 억울하게 처벌당하거나 피해를 입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대한손해보험협회 반기호(潘基鎬)보험범죄대책팀장은 “그동안 상해가 없는 사소한 사고에서도 진단서를 발부받아 보험금을 타내는 바람에 보험료가 오르는 등 성실한 계약자들이 불이익을 받아왔다”며 “이번 판결로 피해자의 말만 듣고 무책임하게 진단서를 발급해주는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김세곤(金世坤)공보이사는 “상처부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단이 달라질 수 있다”며 “초진한 의사의 소견이 가장 중요하다”고만 말했다.
<하종대·민동용기자>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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