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창작팀 클램프가 발표한 ‘춘향전’이 좋은 예다. 퇴마사 춘향이가 등장하는 이 만화의 인물들은 ‘조선사람’이라기보다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적당히 뒤섞은 퓨전형이다. 제목이 ‘춘향전’이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나오고 춘향이가 나오지만, 그것은 일본 작가가 주관적으로 해석한 소재와 배경에 불과하다.
최근 출판된 스메라기 나츠키의 만화는 클램프와 다르다. 그의 만화에서 조선은 흥미로운 배경이나 이국 취향으로 존재하는 타국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일상의 디테일이 시각적인 요소 뿐 아니라 서사적인 측면에까지 골고루 침투해 있다는 말이다.
주로 명이나 청을 배경으로 그 시대와 인물을 매력적으로 재현해온 스메라기 나츠키가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이조암행기’는 제목 그대로 조선을 배경으로한 연작 만화다. 이 만화에는 우리 만화에서도 보기 힘든 갓의 선이 살아 있다. 살아있는 갓의 곡선은 한복의 아름다움과 고운 심성의 사람들로 이어지며, 가슴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로 탄생한다.
‘이조암행기’의 주인공 윤 어사에게는 어사가 되기 위해 아내를 잃어야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이조암행기’를 구성하는 세 편의 단편 ‘원앙의 한’ ‘북방의 질풍’ ‘신세타령’에는 모두 빼앗긴 사랑과 가슴 아픈 사랑이 등장해 윤 어사의 사연과 엮어진다.
스메라기 나츠키는 조선시대의 복식과 관직, 그리고 역사적 상황을 매우 충실하게 재현한다. 조선 후기에 돈을 주고 관직을 팔았던 행위, 주로 여성들이 공양을 드리던 절,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 정절과 죽음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서자에 대한 차별, 국경 마을의 여진족 문제 등의 소재가 낯설지 않게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우리 작가들도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과거의 우리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얼마 전 타계한 김종래 선생의 극화나 박기당 박광현 선생의 만화에서 볼 수 있었던 조선의 멋과 흥취를 다른 나라 작가의 만화에서 발견하는 일을 기쁘다고 해야할지 슬프다고 해야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만화평론가)enterani@yahoo.co.kr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