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현실 정치의 승부수(勝負手)는 이미 던져졌다. 지키느냐, 빼앗느냐의 다툼이다. 그런 만큼 겉으로 말이야 어떻게 하든 이제 상생(相生)정치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모처럼 선거없는 올 한 해만이라도 여야(與野)가 정쟁(政爭)은 접어 두고 경제살리기와 남북문제에 머리를 맞대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집토끼' '산토끼' 다 놓칠라▼
여권이 내놓은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은 더 이상 야당에 밀릴 수도, 언론에 휘둘릴 수도 없다는 공격적 방어책이다. 어차피 ‘반(反)DJ 정서’를 최대 지지 기반으로 하는 한나라당의 협조를 구하기는 힘들고, 등 돌린 ‘반여(反與)신문’을 돌아서게 하기도 간단치 않다면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그런 논리다. ‘집토끼(지지 세력)’ ‘산토끼(반대 세력)’ 다 잡으려고 어물어물하다가 두 마리 모두 놓치는 날에는 당장 국정 주도권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정권 재창출도 끝장이다, 그런 위기감이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여권은 ‘민주적인 절차를 준수하면서 대화와 양보로 풀어가는 것’이 힘있는 정부의 요체라고 말한다. 과거 독재정권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바람직한 정부, 지극히 정상적인 정부이지 굳이 ‘강한’이란 수식어를 붙여 쓸데없는 오해를 낳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그동안 한나라당의 협조를 얻으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안됐다. 의원꿔주기는 그래서 불가피했다. 또 여러 실수와 잘못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부 신문이 너무 흔들어댄다. 그러니 이제는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이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결과는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우리가 잘하면 정권 재창출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안되는 것 아니겠느냐’, 비록 일방적 주장일망정 그렇게 툭 터놓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고 ‘안기부 돈 사건’이 터지고, 언론사 세무조사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안기부 예산을 총선자금으로 빼돌렸다면 그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또 언론사라고 모든 기업이 받는 세무조사에서 열외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안기부 돈 사건’의 경우 어쩐 일인지 ‘몸통’은 피해 가는 기색이 역력하고, 언론사 세무조사에 맞춰 ‘반여신문을 정공법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언론대책문건까지 드러나서야 ‘강한 정부의 순수성’을 누가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상생은 못해도 정도는 지켜야▼
아무리 명분이 있다 해도 시기와 동기의 순수성이 의심받으면 모든 사람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신뢰를 얻지 못하면 공자의 가르침처럼 정치가 있을 수 없으며, 인위적이고 공작적인 냄새가 나면 노자의 말대로 천하를 취할 수 없는 법이다. 대권은 김추기경이 충고했듯이 ‘버릴 때 얻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라고 예외는 아니다. ‘민생 우선의 정치’를 내걸었으면 차기 대권에 연연하는 듯한 모습을 버려야 한다. 구(舊)민정계 중심의 좁은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남 민심에 지나치게 기대서도 안된다. 3김 이후의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여야의 승부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승부는 결국 국민의 선택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다만 여야는 상생은 못할망정 정도(正道)를 지키는 경쟁을 해야 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권을 잡으려 하다가는 권력도 놓치고 나라도 결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 눈물을 씻어 주는 정치, 희망을 안겨 주는 정치로 승부해야 한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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