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통상 가수들이 미8군이나 야간업소에서 몇년씩 고생하다 공식 데뷔했다.
그러므로 가요제 출신으로 본격 출발한 가수는 내가 처음인 것 같다. 내 뒤를 이어 이상은 이상우 유열 신해철 등이 대학가요제와 강변 가요제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가수들은 노래하는 것을 필생의 직업으로 여겼다. 10년 넘게 무명의 설움은 보통이었다. 그 만큼 남다른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이 즐비했다. 어쩌다 한번 립싱크를 했다가는 난리가 났으니 요즘 ‘TV 가수’들과는 크게 달랐던 셈이다.
분장이나 의상 등도 혼자 챙겼다. 분장사나 코디네이터가 없었다. 분장실에서 탤런트와 함께 분장하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즐거웠다. 당시 화장을 잘 못하는 나는 선배 앞에 얼굴 내밀고 ‘분장’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 유명 디자이너가 드문 시절이어서 어떤 때는 출연자들의 옷이 서로 비슷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방송사는 매일 출근해 마치 친정집 같았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젊음의 행진’ 등 쇼프로가 많아 거의 매일 출연했다.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가수들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코너가 많았는데 가사나 음색이 달라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나도 이용의 노래를 남성키로 부르다가 혼났다.
당시에는 음반 판매량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J에게’는 수십만장이 나갔는데 나는 3년 계약금 500만원만 받았다. 계약 때문에 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음반 판매량을 제대로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나는 데뷔 때부터 치마를 거의 입지 않아 특히 남성 팬들이 궁금해했다. 이 때문에 여러 억측이 나돌았지만 “단지 다리가 못나서”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