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書架)는 책들이 잠을 자는 침대이다. 독자가 왕자처럼 와서 깨워 줄 때까지 책들은 거기에 깊이 잠들어 있는 공주들이다. 책들은 또한 파트너 없이 무도회에 와 있는 여인들 같다. 혼자 서 있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의존한다.
간혹 아주 얇은 책 하나가 문득 생각나 서가를 뒤져보지만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책은 마치 ‘옷이 꽉 찬 옷장 안에서 육중한 두 이웃 사이에 짓눌려 몇 달 동안 눈에 띄지 않은 얇은 블라우스’와 같다. 책은 유익한 조언을 해주는 착한 친구이며, 절대로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지 않는다. 입이 무겁고 겸손한 조언자이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일어난 책과 책꽂이, 그리고 독자 사이의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책들은 마음을 열어 보이지만, 책꽂이는 남몰래 연모할 뿐이다.
남의 집에 가서 서가에 꽂힌 책들을 들여다보면 주인의 취향과 그 정신적 기조를 훔쳐볼 수 있다. 로마의 키케로처럼 서재를 정리하고 나면, 자신의 집에 새로운 정신이 깃든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보다 몇 세대 뒤 사람인 세네카가 한 말 처럼, ‘가장 큰 서재는 가장 게으른 사람의 집에 있고, 책과 책꽂이는 벽을 장식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책꽂이 안으로 깊이 밀어 넣고 그 앞의 여유 공간에 다른 작은 장식품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책들을 앞으로 끌어 당겨 서가의 앞쪽 끝에 맞추어 진열하기도 한다. 책꽂이 위의 책들은 그 집주인의 자아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책과 책꽂이와의 관계는 늘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서양의 역사 속에서 책은 파피루스 위의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두루마리의 형태를 거쳐, 서판을 몇 개 묶어 놓은 것 같은 코덱스(codex)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가, 인쇄술의 발전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CD와 전자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인쇄가 시작되기 전, 필사본에 의존하던 중세에 책은 수도원의 보물이었다. 그래서 자물쇠가 달린 궤짝 속에 보관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나중에는 서가나 독서대에 쇠사슬을 달아 거기에 묶어 놓기도 했다. 공중 전화박스 속의 전화 번호부나 열차 속에 묶여 있는 잡지책들처럼 말이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고 행동한다. 봄날, 꽃이 환하게 핀 공원을 산책할 때 우리는 단지 즐길 뿐이다. 마치 바람이 옷깃을 스치듯, 산책 또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족하다.
이 책은 독서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러나 독서를 독서 자체로 즐기는 여유있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봄날 오후, 쏟아지는 햇빛 속을 거니는 환한 산책과도 같은 책이다.
구본형(변화경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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