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질풍노도'의 18세 승부사, 이세돌 3단

  • 입력 2001년 3월 4일 18시 33분


2일 오전 9시 20분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4층 기사실. 이세돌(18) 3단과 ‘반상 인터뷰’를 하기로 한 곳이다.

약속시간 보다 10분 일찍 이세돌 3단이 들어온다. 감색 양복에 진녹색 티셔츠. 그로서는 주요 대국 때 입는 정장차림이다. 평소 기원에서 자주 봤지만 얼마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천하무적 이창호 9단을 2번 거푸 이긴 때문인지 얼굴에 생기가 도는듯 했다.

전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서울 도봉산에 다녀왔다고 한다. 초 봄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큰 승부 뒤의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요즘 기분 어때요.”

“좋아요”하며 싱긋 웃는다.

그의 웃는 모습엔 아직도 짖궂은 개구쟁이 소년의 인상이 짙게 남아있다. 문득 이 해맑은 웃음의 주인공이 냉혹한 승부 세계의 최고수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

“몇 점 놓고 둘까요. 자칭 아마 3단인데….”

“최근엔 아마추어랑 둔 적이 없어서…, 놓고 싶은대로 놓으세요.”

평소 솔직한 그의 어법 그대로다. 말하는 품새는 몇점을 놔도 자신있다는 식이다.

안전하게 6점을 놓을까 하다가 5점을 놨다. ‘5점이면 승부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초반은 차분하다.

이창호 9단과의 대국에 대해 물어봤다.

“준비는 많이 했어요. 이 9단께서 후반이 특히 강하니까 먼저 실리를 챙겨 두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게 적중한 것 같아요. 또 나이 어린 후배랑 둔다는 부담감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쉽게 무너진 느낌도 들고….”

이 3단도 자기보다 어린 최철한 3단 등과 둘 때는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이 3단은 ‘리틀 조훈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수읽기가 빠르고 전투에 강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이 3단의 스승인 권갑용 6단은 “이 3단은 다른 사람이 쉽게 보지 못하는 수를 남들보다 빨리 본다. 그리고 상대가 당하기 싫은 곳을 찾아 내는 능력이 있다. 그게 상대방에게 큰 부담을 주고 이 3단이 일단 심리적으로 상대보다 앞서게 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를 빨리 본다는 것이 이 3단에겐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빨리 두다보니 경솔한 수가 자주 나왔고 재작년까지는 기대만큼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저 잘나가는 신인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32연승을 달리며 자신감이 붙었어요. 누구와 둬도 자신감이 생겼고 형세가 불리해져도 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게 되더라구요.”

대화를 나누던 중 바둑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중반으로 접어들자 이 3단이 조금씩 거세게 밀어부친다. 맞붙어 싸우면 말려들 것 같아 두텁게 두기로 했지만 송곳처럼 찔러오는 백의 착점에 흑의 행마가 자꾸 꼬인다. 이 3단의 손길이 점점 가벼워지는 듯 하다.

이 3단의 바둑엔 좀처럼 양보가 없다. 양보하는게 지는 것보다 더 싫을 것일까. 한 프로기사는 이 3단의 기풍을 이렇게 평했다.

“이 3단은 형세에 관계없이 물러서는 법이 없어요. 그런 면에서 유리하면 조금 참고 물러서는 이창호 9단과는 다르죠. 강하게 반발하다가 때로는 어려움을 자초하기도 하지만 성격상 참는 게 안되는 것 같아요.”

과연 이 바둑에서도 봐주는 게 없다. 백의 강펀치가 흑 대마의 급소를 때린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다른 급소를 찔러온다. 힘껏 발버둥을 쳐봤지만 어느새 백의 포위망은 철그물보다 더 단단해졌다.

“이렇게 심하게 둬도 되는거냐”는 가벼운 항의에 이 3단은 그저 웃을 뿐이다.

바둑계 최고수의 반열에 오른 이 3단이지만 아직 10대 소년. 요즘도 새벽 2, 3시까지 컴퓨터 채팅과 게임을 하느라 잠을 설친다. 바둑을 안했으면 컴퓨터로 벤처를 했을 것 같다고.

벤처도 어울릴 것 같다. 이 3단은 자유분방한 천재형에 가깝다. 바둑 공부도 장시간 진득하게 붙어서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끝낸다. 개성도 강하고 말도 아끼는 편이 아니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기도 십상이다.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다. 그것도 개성이란다. 여자친구 생기면 장만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문득 바둑계의 모차르트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심한 비유일까.

흑대마는 결국 참담하게 숨을 거뒀다. 필자가 돌을 던지자 이 3단은 또한번 싱긋 웃는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창호를 넘보는 '앙팡테리블', 이세돌은 누구인가?

이세돌 3단 이름 앞에는 ‘비금도 소년’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전남 목포에서 배로 2시간 거리의 비금도가 그의 고향. 99년 작고한 그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일찍부터 바둑을 가르쳤다. 형 이상훈 3단도 프로기사.

이 3단은 92년에 서울에 올라와 권갑룡 6단 집에서 6년간 혹독한 바둑 수업을 받았다. 학교는 고향에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니다 그만뒀다.

그의 기재(棋才)는 2000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질풍같은 32연승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박카스배 천원전, %016배 배달왕기전에서 거푸 우승하며 유망주에서 순식간에 정상급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올해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창호 9단에게 2연승을 거두는 등 ‘반상의 반란’을 거듭하고 있다.

이세돌 3단은 이창호 9단과 성격 바둑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 바둑계에선 “이창호 9단은 ‘흑도(黑道)’, 이세돌 3단은 ‘백도(白道)’”라고 비유한다. 이 9단이 깊은 수읽기와 정확한 형세판단으로 현묘한 깊이를 보여준다면 이 3단의 바둑은 치열한 백병전과 현란한 행마로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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