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교수의 희망열기]목사와 여간첩의 대화

  • 입력 2001년 3월 11일 18시 53분


한 목사가 비행기로 긴 여행을 하게 됐다. 여러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동석하는 손님과 대화라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석자는 기대에 어긋나는 여자였다. 짙은 화장이 눈에 거슬릴 정도였고 거북스러울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이 화류계 여성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목사는 대화를 단념하고 성경 읽기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참 뒤에 식사시간이 됐다.

그 때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옆자리의 젊은 여성이 “목사님이신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목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신앙적 양심이냐 현실이냐▼

여자 손님은 조심스럽게 정중한 어조로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명문대 출신이기도 합니다. 직업을 선택하게 됐는데 어쩌다가 정보부 요원으로 발탁됐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모를 갖추면서도 이렇게 야한 몸차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적으로는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간첩들보다 앞서야 합니다. 지금도 그 임무를 띠고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직업상의 갈등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신앙적 양심 때문에 이 직업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대신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또 그 직책을 소홀히 한다면 아메리카에 불행과 비극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편히 이 일을 계속할 자신도 없습니다. 사회 공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킨다는 것도 쉬운 일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제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는 대답을 보류한다. 사실은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만일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그것은 잘못된 직업이다’라든지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 일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선택이니까 편한 마음으로 간첩들을 대하며 스파이 활동을 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본질과 규범윤리를 신봉하고 있는 기성적인 가치관에 대한 현실과 상황윤리를 강조하는 현대인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대변하기 위한 내용에서 나온 것이다.

목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 도덕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관념적인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지성인들까지도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그것은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틀렸다, 그것은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악이다, 그것은 공자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다, 그 생각은 우리의 주장과 반대이기 때문에 잘못이다는 등의 대답을 한다. 정신적으로 이미 어떤 교조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더 큰 과오를 범하면서도 말이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 경제분야나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윗사람들, 소위 스스로를 출세했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면 그뿐이다,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릴 필요가 없다, 앞서는 사람이 승리하며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사람의 편을 들어준다, 양심의 고뇌나 고루한 가치관들은 너희를 괴롭힐 뿐이라고 말한다. 소유를 늘리고 명예를 얻을 수만 있다면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고 자위한다.

그렇다면 이런 본질적 가치와 상황적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는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가. 둘 다 잘못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다운 삶 위해 살아야▼

서구사회의 선진국민은 한때 절대적 진리를 믿는 자연법시대를 겪었다. 다음에는 그 반동으로 일어난 역사주의 가치관을 체험했다. ‘모든 진리는 시대의 딸들’이라는 극단의 상대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인간 실존의 사상과 다양한 삶을 근원적으로 통합 발전시키려는 휴머니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도 그 어느 한쪽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기도 하다.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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