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密使의 계절'이 돌아왔다

  • 입력 2001년 3월 20일 17시 49분


정치권 ‘밀사’들의 움직임이 부쩍 분주해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지형이 본격적인 대선 체제로 재편되는 상황의 증거로 보인다. 각 대권 주자, 혹은 세력간 협조관계 구축 내지는 중립화를 위해 정치권 물밑에서 움직이는 밀사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DJP 공조복원(1월8일)을 계기로 이런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는 분위기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JP),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그들과의 관계가 갈수록 꼬여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이나 제휴 움직임을 게을리하기는 곤란하다. 이총재 측근인 고흥길 의원은 “반창(反昌) 전선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며 “참고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고 말했다.

DJP 공조체제의 가시화에도 불구하고 이총재가 JP를 만난 뒤 “지면서 이기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말한 것처럼 한나라당은 아직 JP를 민주당과 ‘한 묶음’으로 확정하지 않은 듯하다. 다음 대선까지 1년여의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정국 흐름의 변화에 따라 JP의 태도가 변할 여지가 있다고 기대하는 것. 이에 따라 JP에게 공을 들이는 이총재 밀사들의 역할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꼬인 것은 풀고 관계는 돈독하게”

이와 관련, 한나라당 하순봉 부총재는 “주로 박희태 김진재 유흥수 의원 등이 JP와 핫라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진재 의원의 한 측근 역시 “상임위(과학기술정보통신위)도 JP와 함께하고 있고 민자당 시절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 두 사람 모두 일본통인 점 등 공통 분모가 많아 평소 친한 사이”라고 김의원과 JP 관계의 돈독함을 강조했다.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인 유흥수 의원은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JP와 일본 방문을 앞두고 청구동 자택에서 만나는 등 16대 국회 들어 잦은 만남을 갖는 핫라인으로 부상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JP와 친밀한 사이인 박희태 부총재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YS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민주계 인사인 서청원 의원, 김수한 전 의원 등이 밀사의 주축. 하순봉 부총재는 “이들은 YS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YS 쪽과는 다양한 채널이 잘 만들어져 있다”고 전했다.

홍사덕 국회부의장과 김진재 의원도 나름의 채널을 가동한다. 특히 YS와 같은 김녕 김씨인 김진재 의원은 한 달에 한 번씩 YS와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1월에는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만났고 2월에는 강남 한 음식점에서 3시간 가까이 만찬을 함께 했다. 지난 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YS 부부의 금혼식에 김의원은 민주계 인사도 아니고 YS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지내지 않은 인사로는 유일하게 특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한 측근은 “JP나 YS 모두 김의원에 대해 신뢰감을 갖고 있기에 밀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밀사들이 분주히 이총재와 YS 사이를 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총재에 대한 YS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이에 대해 서청원 의원은 “민심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돌아섰다. YS도 결국 민심의 흐름에 따를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한편 이총재는 그동안 공을 들여왔던 민국당 김윤환 대표와의 관계 개선을 최근 완전히 포기했다. 김대표가 이제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한 것. 이에 따라 이총재는 김대표와 라인을 형성했던 하순봉 박희태 의원에게 접촉 중지령을 내렸다.

최근 들어 초조한 기색을 보이고 있는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 진영은 JP와의 관계 개선이 대권 도전 발판 만들기의 급선무라고 보고 있다. ‘JP와 소원해지면 여당 후보가 되기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다.

JP와 꼬인 매듭을 풀기 위해 최일선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박범진 전 의원이다. 그는 올 들어 두 차례 JP를 만나 분위기를 탐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의원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정치다. 지금은 이위원과 JP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민주당, 한나라당, 청와대 사람 등을 두루 만나며 ‘광폭정치’를 펼치는 JP가 이위원을 안 만날 이유가 있느냐”고 말했다.

김윤수 공보특보도 밑바닥에서 분위기 조성에 노력하고 있다. 자민련 경기도 파주 지구당위원장과 수석부대변인을 지내고 지난해 8월 이위원 진영에 합류한 그는 요즘 자민련 당사에 자주 모습을 보인다. 지난 5일에는 자민련 조직국 사람들과 폭탄주까지 돌리는 술자리도 가졌다. 본인은 “있던 곳이고 다 아는 사람들이어서 인사차 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생각’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지연, 학연, 혈연 동원 속깊은 얘기 전달

자민련 후보로 총선에 출마한 경험이 있는 코미디언 김형곤씨와 김부곤 특보도 막후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코미디언 김씨는 박영옥 여사나 박재홍 전 의원 등 JP의 처가 쪽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라는 전언. 이위원 쪽에서는 이수영 비서실장에게도 공을 들이고 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 자민련 김종호 총재권한대행에게 이위원이 JP와의 관계 개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이실장은 “JP가 먼저 (이위원을) 만나자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민주당 한화갑 최고위원과 이인제 최고위원 사이에도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있다. 이위원 쪽의 김충근 특보와 한위원 쪽의 양종직 특보가 서로 핫라인을 열어놓고 있는 상태. 김충근 특보는 “한위원과 긴장관계로 갈 이유가 없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폈다. 이위원과 동향(충남 논산)이고 지난해 8·30 경선 당시 ‘한화갑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김수진 전 민주당 총재특보도 이위원 쪽과 접촉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이위원과 한위원은 지난해 7월과 12월 두 차례 단독회동 약속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외국에 나가 있던 한위원이 폭설로 인해 귀국이 늦어지는 바람에 회동이 취소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밀사들의 물밑 활약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위원과 JP간에는 어떨까. 한위원은 지난 달 8일 저녁 JP와 만났다. JP가 “부시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미국에 갔던 사람들끼리 해단식이나 하자”고 해서 이루어진 이날 만남에 앞서 JP는 한위원에게 “누구를 데려갔으면 좋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한위원이 거명한 사람이 변웅전 대변인. “누가 와도 좋지만 변대변인은 꼭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 정가에서는 “한위원과 JP가 잘 통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중간에서 변대변인이 여러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추측이 나왔다.

최근 참모진을 대폭 개편한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진영은 한화갑-김근태 최고위원 진영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노장관 진영의 조직담당 책임자인 염동연-이강철씨와 김위원 진영의 장준영 한반도재단 기획실장 등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노장관의 한 측근은 “한위원 쪽 실무자들과도 잦은 만남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정동영 최고위원까지 포괄하는 한화갑-김근태-노무현-정동영 연대전선 형성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각자 뛰는 데까지 뛰어보고 가장 앞선 사람을 밀어주는 이른바 ‘개혁연대’의 태동 조짐으로 분석하는 것. 그러나 아직은 매우 설익은 단계로 가상 시나리오에 불과한 실정이다.

<소종섭 주간동아기자>ssj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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