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각되는 서산의 꿈 = 서산농장까지 매각하면 왕회장의 혼(魂)까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현대건설이 서산농장을 매각키로 하자 현대 직원들은 한결같이 왕회장은 선산을 파는 심정일 것 이라고 아쉬워 했다.
서울 여의도의 30배에 달하는 서산농장. 고향인 강원도 통천을 무일푼으로 떠나온 농군 정주영 의 통일 꿈이 담긴 곳이자 제2의 고향이었다.해외 건설 사업이 한창이던 1977년 현대는 농지를 조성하기 위해 간척사업에 뛰어들었다.79년 정부로부터 서산 매립 허가도 받아냈다. 방조제 건설에 초대형 폐(廢)유조선을 동원해 물살을 막는 이른바 정주영 방식 유조선 공법 이 적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왕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이 공법으로 현대건설은 280억원의 공사비를 절감했다.공사기간도 36개월이나 단축,건설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그러나 현대 유동성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마침내 매각되는 운명에 처했다.왕회장의 마지막 희망까지 결국 물거품이 된 셈이다.
▽실패의 쓴 맛을 준 정치실험=6공화국 말 그는 새로운 인생실험에 나선적이 있다.
정부정책에 대한 반발 등으로 국세청이 1361억원의 세금을 추징하자 돈이 없어서 세금을 못내겠다 며 납세거부까지 했던 그는 정치자금을 낼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판에 나서기로 한 것. 국민당 바람을 일으키며 총선에서는 승리한 그였지만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쓰라린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정치 외도 에 나섰다가 정권의 괘씸죄 에 걸려 문민정부 5년동안 숨죽이며 살았던 그였다.정치 실험 실패는 그의 건강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현대그룹 경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면서 대북 경협 사업에만 관심을 보였다.
▽고전하는 금강산 사업=그가 말년에 가장 정성을 기울였던 금강산 사업도 수익성 부재 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사업 시작 2년만에 무려 4000억원의 적자를 내자 금강산 입산료 인하를 둘러싸고 북한측과 실랑이를 벌일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까지 겪고 있는 상황이다.왕회장은 금강산 관광을 시발로 개성공단 건설 등 북한 프로젝트 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지만 끝내 결실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고로(高爐)사업 진출도 못 이뤄=1997년 10월 현대그룹은 경남 하동에 일관제철소를 착공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적이 있다.2005년에 고로제철소를 완공하겠다는 것. 현대는 당시 현대제철소 건설을 가로막는 정부 뒤에는 포철의 공작이 있다 고 주장하며 건설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왕회장은 공사석에서 고로사업이 독점체제로 운영되고 있어 횡포가 지나치다 라는 자주 언급했다.자동차 중공업 등 철강수요가 많은 현대의 사업구조를 고려해,직접 고로사업을 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현대제철소 허용 여부는 하동 지역의 환경영향평가가 끝난 다음에나 검토해 볼 문제 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끝내 이 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동원기자>davi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