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씨(가명·67)는 지난해 말 본보 취재팀을 만난 자리에서 “아무리 고문이 심해도 하지 않은 살인을 했다고 시인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씁쓸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께 아무리 기도했지만 현세의 생명을 앗아갈 만한 육체적 고통은 참아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씨가 주장하는 고문과 자백의 경위는 그가 72년 9월26일부터 같은 해 10월12일까지 겪은 일들을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서 원고지 30쪽에 깨알같은 글씨로 기록한 ‘수난일기(受難日記)’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10월7일 토요일. 아침 11시쯤 나를 또 지서로 오란다. 가자마자 숙직실에 가두고 9월 26일부터 3일 동안의 행적을 쓰라고 한다. 밤 10시쯤 해서 본서 보호실로 끌려갔다.’
‘10월8일 일요일. 새벽 1시쯤 해서 형사실 고문실로 끌려갔다. ○형사와 ×형사가 밤새도록 몹시 때리며 엎드려 뻗쳐와 토끼뜀 등 참기 어려운 심한 강압신문을 받았다. 아침 7시반쯤에 ○형사 등 세명이 나를 데리고 동면지서로 갔다. 3일간의 행적을 썼다. 졸립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온종일 설사를 하면서 몇 번이나 다시 썼다.’
고문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한 것은 다음날인 9일 새벽.
‘밤 12시쯤 그들은 나를 데려와 형사실 옆 골방 고문실에 집어넣었다. 주전자에 물을 떠오고 알 수 없는 준비가 착착 진행중이다.’
“○형사가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으니 솔직히 자백하라’고 한다. ‘그러면 자수한 걸로 해서 죄를 가볍게 해 주겠다’고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5분간의 여유를 준다고 했다.(중략) 형사들이 옷을 갈아입었다. 위에는 군인 작업복이다. 나의 눈에 비치는 것은 마치 도살장에서 소 잡고 돼지 잡고 하는 칼잡이 같다. 모두가 다 살기 등등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옷을 벗으라고 했다.”
정씨는 이후 양발목과 양손을 묶은 뒤 양 무릎 뒤에 봉을 끼워 사람을 허공에 거꾸로 매다는 ‘통닭구이’ 또는 ‘비행기 태우기’라는 고문자세를 취하게 된 상황을 세밀히 묘사했다.
‘가슴에 찬물을 끼얹는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다. 얼굴에 물을 붓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물을 마구 먹는다. 고통을 겪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 아 무엇에다 비유하리. 정신이 흐려졌다.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을 어떻게 지껄였는지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살기 위한 거짓말, 자백 아닌 허위자백을 되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아, 아, 아, 꿀적 꿀적 푸우 푸우. 말한다. 말하겠어요. 내가 죽였어요. 그만 하시오. 그만.’
이것이 정씨가 기록한 자백의 시작이다. 그 후 정씨는 비슷한 고문을 당하면서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범행’을 시인했다고 적고 있다.
‘나는 확신했다. 죄의 유무는 재판과정에서 공정하게 드러날 것이지만 지금은 우선 가족의 안전이 급선무였다. 잘못하면 그 무서운 몸서리쳐지는 고문이 또 내려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 정씨가 가졌던 확신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관련 경찰관-재판부 입장▼
‘초등학생 강간살인’ 사건의 정진석씨(가명·67)는 정말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한 것일까.
정씨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본보 취재팀은 정씨를 수사한 경찰관들을 직접 만나 확인을 시도했다. 관련 경찰관은 모두 9명. 이들은 당시 김현옥(金玄玉)내무부장관의 시한부 검거령에 맞춰 ‘범인을 검거한’ 공로로 2명이 특진을 하고 2명은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햇수로 30년이 흐른 현재 2명은 사망했고 3명은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 어려운 추적 끝에 취재팀은 경찰에서 은퇴한 뒤 춘천에서 살고 있는 4명을 만났다. 고문의 가능성을 확인해 준 A씨의 진술은 16일에 나왔다.
춘천에 살고 있는 A씨는 정씨를 고문했다고 명백히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용의자에게 ‘비행기 태우기’ 등의 고문을 했다. 정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맞을 것”이라고 말해 고문 가능성을 사실상 시인했다.
A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문사실을 부인했다.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던 H씨(74·당시 경사)는 고문여부에 대해 “사건 자체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그는 당시 강원도경 소속으로 사건발생 직후 춘천경찰서에 파견돼 정씨의 최초 자백을 받았다고 정씨가 지목한 인물. H씨는 “당시 현장인 춘천경찰서와 강원도경의 연락업무 및 서기 역할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상부기관에서 파견됐기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P씨(66·당시 경위)는 “정씨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물증은 없었으나 자백을 녹음한 테이프 때문에 심증을 굳히게 됐다”며 “녹음 테이프 내용은 범행을 직접 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이 경찰서에 진을 치고 있었고 고문은 절대 없었으며 아직도 정씨가 진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L씨(64·당시 순경)는 “다른 곳에 파견 나갔다가 돌아오니 이미 다른 직원들이 분야를 나눠 수사중이어서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검사였던 정모변호사(60)는 “당시 경찰관들에게 정씨의 자백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본 기억은 있다”며 “정씨는 법정에서도 고문과 허위자백을 주장했지만 재판부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1, 2심 재판부 판사들은 모두 “사건 자체와 고문 공방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춘천·홍천〓이명건기자>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