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최초 수정본의 내용이 너무나 자국 중심의 사관(史觀)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예상외로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부과학성이나 시민단체 등은 모임측이 문부과학성의 대폭 수정 요구를 받으면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검정 신청을 철회할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검정 신청을 철회하면서 이를 ‘훈장’으로 삼아 세력 확대를 꾀할 것이라는 그럴듯한 설도 나돌았다.
그러나 모임측은 137곳에 대한 수정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회장은 “그래도 우리의 정신은 살아있다”고 주장했지만 기술된 내용으로만 본다면 기존의 7종 교과서와 비슷한 교과서가 되고 말았다.
이는 일단 검정을 통과해 ‘제도권 교과서’의 위치를 확보한 뒤 점진적인 수정을 통해 ‘독자적인 색깔’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또 지금까지 투자했던 경비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비록 검정을 통과하긴 했지만 당초 지향했던 교과서 수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면서 모임측의 내부에서 원칙고수파와 현실인정파 사이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활동 | ||
1996년 | 12월 | ‘현행 역사교과서는 자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창립 기자회견 |
1997년 | 1월 | 설립 총회 |
3월 |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 심포지엄 개최 | |
1998년 | 9월 | 전국 9개 블록에서 강연회 심포지엄 개최하고 지부 설립에 착수 |
1999년 | 6월 | 교과서 채택과정에서 교육위원의 권한 강화하라며 지방의회 상대로 청원 시작 |
2000년 | 10월 | 역사교과서의 원본인 ‘국민의 역사’ 발간, 47개 도도부현에 48개 지부 설립 |
12월 | 회원 1만명 돌파 발표 | |
3월 | 2000년 3월 전 도도부현에 이사 등 파견해 강연회 의원세미나 요인면담 간담회 등 개최 | |
4월 |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공민교과서 검정 신청 | |
5월 | ‘국민의 방심’이라는 책자 만들어 교육위원들에게 무료 배부 | |
7월 | 제3차 총회 열어 ‘위안부 기술이 줄어든 것은 우리 운동의 성과’라고 보고 | |
8월 | 검정 신청중인 교과서 내용을 보도한데 대해 항의하며 아사히와 마이니치신문에 공개질의서 | |
2001년 | 4월 | 2001년 4월 역사교과서와 공민교과서 합격 결정 |
모임측은 1997년 1월 출범하면서 설립 취지문을 통해 “전후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잃어버리고 일본인의 긍지를 빼앗아 왔다”며 “특히 근현대사는 일본은 자자손손 사죄만 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죄인처럼 취급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일본의 어린이들을 위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역사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밝혔다.
이 단체 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기존 7개 역사교과서에 모두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 교과서들이 ‘자학사관’에 빠져있다며 종군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이 단체는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유사관’이라고 부르며 “학생들에게는 좋은 점을 가르쳐 일본에 대한 긍지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임은 창립 총회 이후 수차례에 걸쳐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강연회, 심포지엄, 요인면담 등을 열어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했다. 지부결성에도 착수해 99년 10월까지 도쿄(東京)의 두 곳을 포함해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전체에 지부를 만들었다. 회원은 1년 전에 1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이 모임은 회장인 니시오 전기통신대 교수(독일문학)를 포함해 13명의 이사가 이끌고 있다. 니시오 회장은 99년 이번에 문제가 된 교과서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를 집필했다.
후지오카 노부가쓰(藤岡信勝·교육학) 도쿄대 교수는 모임의 이론가로 활약하고 있고 니시베 스스무(西部邁·평론가)는 이번에 공민교과서를 집필했다.
‘전쟁론’과 ‘대만론’으로 유명한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도 이사로 활약하고 있다. 국학원대 강사인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신도학)가 사무국장이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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