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수해준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다만 남은 건 형체만 있는 실루엣뿐.
그런데 이상하게도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그 어떤 현대적인 애니메이션보다 새롭다. 기품이 있지만 젠체하지 않고 낯설지만 정겨움까지 버리진 않았다.
<키리쿠와 마녀>에서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질감을 멋지게 잡아냈던 미셀 오슬로 감독은 고대 중국의 '그림자 놀이'를 연상시키는 실루엣만으로 한 편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내용은 안데르센 동화집에서 읽었던 교훈적인 우화가 아니라 작자미상의 구전설화들. 개중 감독이 직접 만들어낸 이야기도 섞여 있지만 그것 역시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그러나 이 시금털털한 옛날 옛적 이야기를 포장해낸 방법은 분명 새롭다.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힘 하나 안들이고 모두 까발리는, 게다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로 매력적인 웃음을 끊임없이 선사하는 이 애니메이션이 평범하게 느껴질 리는 만무하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오면 아름다운 마법과 꿈의 세계가 시작됩니다." 의미심장한 한 마디가 화면을 훑고 지나가면 진짜 어둠의 세계가 펼쳐진다. 손님 없는 허름한 극장에서 소년 소녀가 늙은 영사 기사의 도움을 받아 평소 꿈꿔오던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왕자와 공주가 되고 싶을 땐 드레스와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마녀가 되고 싶을 땐 또 마녀 의상으로 멋지게 갈아입는다. 일본에 가고 싶으면 단아한 일본 풍경 위에 서고 이집트에 가고 싶으면 고풍스런 중세 풍경 위에 선다. 물론 이건 모두 몇 개의 선으로 그려진 풍경이며 실루엣으로만 남은 인물일 뿐이다.
마법에 걸린 공주를 위해 풀숲에 흩어진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매는 왕자 이야기, 무화과나무 한 그루로 독선적인 여왕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소년 이야기,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마녀의 성문을 쉽게 열어 젖힌 청년 이야기, 일본 노파의 꾀임에 빠져 하루종일 팔도유람을 한 후 특별한 선물을 받은 청년 이야기,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잔인한 여왕과의 게임을 지혜로 이겨낸 조련사 이야기, 개구리로 변한 왕자와 그를 구하려다 함께 애벌레로 변한 공주 이야기.
서로 다른 이 6개의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결국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만난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의 악을 씻어준다는 진리. 미셀 오슬로 감독은 이 순수한 삶의 진리를 무게 잡지 않고 특별한 교훈을 주겠다는 의지도 없이 은근슬쩍 전해준다. 현란하지 않은 데도 아름답고 오버하지 않는데도 유쾌한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정말 특별한 애니메이션이다.
한 외신은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대해 "완벽하고 위대하며 겸손한 영화"라고 했는데 그것만큼 이 영화를 적절히 묘사한 평도 드물다. 애니메이션 만들기에 관한 메타 영화이자 중국 '그림자 놀이'를 활용한 특별한 질감의 이 애니메이션은 영화 중간에 또 하나 멋진 위트를 만들어놓았다.
3개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나면 관객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1분간의 휴식 시간을 마련해준다. "1분간 휴식입니다. 옆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세요." 나는 만들었으니 너희들은 보고 느끼라고 강압하는 게 아니라 관객과 함께 호흡하려는 의지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월레스 앤 그로밋>이나 <치킨런>도 새로웠지만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새로움을 전해준다. 평생 내 몸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그림자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다.
<키리쿠와 마녀>에서 오슬로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디디에 브루너와 프랑스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장 프랑소와 라귀오니 감독이 이 영화의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작곡가 크리스티앙 메르가 신비로운 음악을 덧붙였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원제 Prince & Princess/감독 미셸 오슬로/관람등급 모두 이용가/개봉일 5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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