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람·세상]"방심이 큰일 낸다는 것 바둑서 배워"

  • 입력 2001년 4월 11일 19시 00분


“버리지 못하는 게 3가지 있어요. 본처, 골프 그리고 바둑. 원래는 담배도 여기에 들어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져 포기했고, 나머지 3가지는 무덤까지 가져갈 겁니다.”

국내 최대 로펌 중 하나인 법무법인 태평양의 김인섭(65·아마 5단) 대표 변호사. 100여명의 변호사들을 거느리는 로펌의 대표 변호사답지 않게 소탈한 인상과 말솜씨다.

이달 초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기원. 윤기현 9단과 바둑을 두던 김 변호사를 만났다.

잔 끝내기만 남은 상태에서 백(윤 9단)이 20집 가까이 이긴 형세.

“아니, 석 점 놓는 하수가 고수 대마를 잡겠다고 덤비시면 어떡합니까.”(윤 9단)

“젊은이(?) 바둑에 패기가 있어야지, 한 두 판 이기겠다고 소심하게 두면 되나.”(김 변호사)

이윽고 계가를 하니 딱 20집 차이. 김 변호사는 말로는 역전패에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듯 즐거운 표정이다.

두 자리 급수 수준이던 그가 바둑을 본격적으로 두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 판사 직을 그만둘까 하는 기로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동네 기원에 나갔다. 기재가 있었던지 한 달에 한 급씩 늘어 금새 아마 3단 실력이 됐다. 이후 대전에 내려가 당시 고영구 판사 등과 바둑을 두며 실력을 쌓았다.

당시 일화 하나. 법조인 바둑대회에서 당시 법조계 최고수로 불리던 전모 변호사와 결승전을 벌이게 됐다. 김 변호사는 평소 전 변호사에게 석 점을 놓고 두는 처지.

전 변호사는 “형님, 둬보나 마나니까 그냥 포기하시죠”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국 결과는 김 변호사의 승리. 초반에 크게 유리했던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궈낸 것.

“그 때 바늘 끝 만한 방심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는지 깨달았죠. 아무리 쉽고 단순한 사건이라도 정성을 다해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그가 유선방송위원회 위원으로 있을 때 케이블 TV 바둑 채널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것도 바둑계에 잘 알려진 사실. 회의적 반응을 보이던 방송위원들을 일일이 설득해 바둑 채널을 만들었던 것. 물론 바둑TV는 큰 인기를 끌며 케이블채널 중에서 흑자를 내는 몇 안 되는 채널이 됐다.

그는 변호사들에게 바둑 등 여가를 가지라고 권유하는 유일한 로펌이 태평양이라고 자랑스한다.

“아무리 바빠도 ‘망중한(忙中閑)’을 가지며 몸과 마음을 충전해야 합니다. 물론 가장 권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둑이지요. 바둑 한판 두면 머리가 환해지고 시원해지는 느낌, 아는 사람만 압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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