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치적이라구요? 악당의 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뇌수를 보며 열광하게 만드는 액션영화야 말로 진짜 정치적인 게 아닌가요?" '정치'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팀 로빈스는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할 뿐"이라며 자신의 지난 행보를 설명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오스카 시상식 무대에 올라 "정부의 에이즈 양성 반응자 억류 수용에 반대한다"고 선언했고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영화 <데드 맨 워킹>을 감독한 그는 그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을 뿐이다. 옳다고 믿는 일을 하고 언론에 무방비 노출된 배우라는 직업을 그 일에 십분 활용한다.
팀 로빈스의 이름 앞에는 B급 영화의 대부 에드우드가 그토록 닮고 싶어했던 영화 천재 '오손 웰즈'의 이름이 아무 거리낌 없이 붙여졌다. "제2의 오손 웰즈, 팀 로빈스." 로버트 알트먼이 '오손 웰즈의 환생'이라고 불렀던 팀 로빈스는 정말로 어릴 적부터 모든 면에서 천부적이었다.
12세 때 뉴욕 연극무대에 데뷔한 그는 물론 처음부터 주목받는 배우가 되진 못했으나 서서히 그 끼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연예계에 뛰어든 배우들이 흔히 공부를 뒷전으로 미뤘던 것과는 달리 그는 학업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배우가 패션 아이템을 개발하는 것보다 세상의 흐름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어쩌면 굽히지 않은 신념과 깎아지른 듯한 비판의식을 지닌 그의 이미지가 다소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팀 로빈스는 절대 보수적인 '레이건'이 아니다. 포크 밴드 '하위웨이 맨' 맴버였던 아버지와 출판사 간부였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유로운 히피 기질이 그에게도 충분히 있었다.
그는 가끔 '쓸모 없는' 영화에 출연해 싱거운 연기를 펼치다 사라지곤 하는데, 따지고보면 그것마저도 모두 이유 있는 객기나 다름없었다. <낫싱 투 루즈>는 "<데드 맨 워킹> 편집 작업을 하던 중 너무 머리가 아파서" 출연하게 된 영화였고 <미션 투 마스>는 "아이들이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연하게 된 영화였다.
생각해보면 팀이 항상 비판적인 영화에만 출연했던 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밥 로버츠> <데드 맨 워킹> <크레이들 윌 록>은 비판 의식이 투철한 영화였지만 나머지 영화들은 코미디와 멜로, 싱거운 스릴러가 혼합된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베트남 전의 후유증을 다룬 영화 <야곱의 사다리>와 인종차별을 다룬 <정글 피버>만이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그의 '정치적인 경력'을 희미하게나마 증명해줄 뿐. 큰 키 덕분에 간신히 화면에 잡힐 수 있었던 <탑 건>, 훌라후프 발명가 이야기를 다룬 <허드서커 대리인>, '팀의 어린 시절 우상' 로버트 알트먼이 연출한 <플레이어> <패션쇼>, 팀 로빈스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쇼생크 탈출> 등은 사실 '정치'와는 무관한 작품들이다.
4월21일 국내 개봉되는 팀 로빈스의 신작 <패스워드> 역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스릴러 영화. 정보의 공유를 꺼리는 컴퓨터업계의 실력자 게리 윈스턴(팀 로빈스)과 윈스턴의 정보 독점을 막으려는 젊은 컴퓨터 천재 마일로(라이언 필립) 간의 대결이 박진감 넘치게 담겨져 있다. 이 영화에서 팀 로빈스는 젊은 컴퓨터 천재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악랄한 컴퓨터 독재자를 연기하는데 "0 아니면 1, 생존 아니면 죽음"이라고 강변하는 그의 악독한 표정 연기가 일품이다.
"욕만 진탕 먹게 될" 악당 캐릭터를 순순히 연기한 이유? 그런 건 특별히 없다. 그는 "내가 즐겁기 위해 이 영화에 출연했고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며 남들이 즐거우면 좋다"고 말한다.
다만 팀 로빈스가 끝까지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기 검열(Self-censorship)'. 그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자기 자신"이라며 "무절제한 자기 검열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강조한다.
진지함과 싱거움, 선과 악을 오가는 그의 '변신'이 긍정적인 이유는 적어도 그가 맹목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는 타입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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