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변신의 마술사, 앤서니 홉킨스

  • 입력 2001년 5월 4일 19시 49분


사람은 수술자국 없이 자신의 외모를 얼마나 뒤바꿀 수 있을까. 형편없는 가죽 부대에 불과한 인간의 몸은 세월이 흐르기 전까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게으르게 변하는 외모가 거추장스러웠던 한 남자는 인간의 숙명을 거부했다. 수술자국조차 남기지 않은 채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한 배우, 바로 앤서니 홉킨스다.

성난 말투 하나로 사람을 끝장내버릴 것 같은 앤서니 홉킨스는 본래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배우다. 기억하려 해도, 그의 얼굴 위엔 여태껏 출연했던 수많은 영화 속 캐릭터들만 겹쳐진다.

<노틀담의 곱추>의 온몸이 일그러진 콰지모도, <번커>의 사악한 파시스트 히틀러, <닉슨>의 미국 대통령 닉슨, <피카소>의 입체파 화가 피카소, <양들의 침묵>의 아주 매력적인 악당 한니발 렉터 등. 앤서니 홉킨스만큼 영화 속에서 자주 얼굴을 뒤바꾼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가을의 전설>에서조차 얼굴을 찌푸린 반신 불구자였다.

이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사람들은 그의 잦은 변신을 할리우드의 놀라운 분장술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앤서니 홉킨스는 분장 없이도 말투 하나로 눈짓 하나로 분위기를 뒤바꿀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그는 자신의 이런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촌뜨기 소년은 17세 때 공부를 때려치우고 연극 무대에 섰다. 말의 눈을 찌른 소년과 정신과 의사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에쿠우스>는 그의 연기 인생에 중요한 획을 그어준 작품. 브로드웨이를 뒤흔든 이 연극에 출연한 후 그는 할리우드가 탐내는 배우가 됐다.

지독한 광기와 카리스마 덕분에 한때 '리처드 버튼의 후예'로 평가됐던 그는 그러나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를 지치게 한 건 술에 절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30대 중년의 모습을 봤다. "그것이 미친 짓"임을 빨리 알아채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린 아주 매혹적인 살인마였던 한니발 렉터를 쉽게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술을 끊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일을 하는 덴 고작 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알코올에 쉽게 빠져든 만큼 쉽게 그 굴레를 빠져나온 그는 그후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엘리펀트 맨>은 할리우드에서의 '대기만성'을 예고한 작품이었으며 <바운티호>는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준 작품이다. 그후 앤서니 홉킨스는 드디어 <양들의 침묵>을 만났다.

영특한 두뇌로 인간의 본능을 집요하리 만큼 잘 이용하는 살인마 한니발 렉터. 스탈링 요원을 능욕한 뒤 아주 지적이면서도 잔인한 방법으로 보호소를 뛰쳐나갔던 한니발은 <하워즈 엔드> <남아 있는 나날들> <피카소> <마스크 오브 조로> <아미스타드> 등을 거쳐 2001년 또 다시 우리 앞에 돌아왔다.

유럽의 한 미술관에서 10여 년의 시간을 낭비한 한니발 렉터는 더 이상 스탈링 요원과 심리적인 갈등을 벌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충분히 매혹되어 있다. 너무 드러나 있는 캐릭터라서 전편보다 훨씬 매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지적이고 특별하다. 이건 분명 한니발 렉터의 캐릭터가 멋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앤서니 홉킨스가 아니었다면 한니발이 이렇듯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었을까. <한니발>을 보고 나면 멜 브록스가 그를 가리켜 "연기의 베토벤"이라고 칭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다.

앤서니 홉킨스는 이변이 없는 한 오랫동안 한니발 렉터의 유혹과 강박에 매몰되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또 어느 순간 능숙한 변장술로 우리 곁에 다가와 한니발이 아닌 완벽히 다른 모습으로 능청을 떨테지. 그는 자신이 앤서니 홉킨스라는 사실조차도 쉽게 숨길 줄 아는 특별한 비법을 알고 있으므로.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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