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사공일/재벌논쟁은 본질 아닌데…

  • 입력 2001년 5월 17일 18시 30분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며, 아주 오래된 어처구니 없는 먼나라 이야기가 생각난다. 기근이 심했던 시절, 어느 시골 마을에 돼지 몇 마리를 기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가족들이 기근에 시달려도 이 돼지들을 잡아먹을 수 없다고 버텨오던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쳐들어왔다. 총질을 하고 난장판이 나자 이에 놀란 돼지들은 집안 구석구석으로 날뛰게 되었고, 그 결과 이리저리 혼자서 바쁘게 총질을 하고 다니던 주인에게 이들은 큰 방해물이 되어 버렸다. 화가 난 주인은 자기가 애를 쓰며 보호하려 했던 바로 그 돼지들을 바깥으로 쫓아 내버리고 계속 총질을 했다 는 이야기다.

일상 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일을 망가뜨리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목표한 지점까지 빠른 시간 내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뛴다면, 목표의 반대 방향으로 뛰면서 빨리 뛴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단에 집착 목표는 잊었나▼

자기가 이룩하려는 목적과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혼돈하는 것은 어리석은 돼지주인이나 할 일이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재벌관련 시책에 관한 정부와 재계, 그리고 여·야간의 공방을 보며 우리 모두가 목적의식을 상실한 돼지주인이 되고 있지 않나 염려스럽다. 환란 이후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며 재계와 기업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쳐온 기업구조조정 은 그 자체가 우리가 이룩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기업 모두의 능률향상을 통한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단이다. 더욱이 이러한 구조조정은 과거와는 다른 오늘날 세계화 시대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재벌기업을 포함한 모든 기업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그동안 정부와 기업이 함께 추진해온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시책과 조치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과거에 이미 저질러진 부실을 정리함으로써 기업경쟁력을 제고하는 것과, 둘째, 과거에 저질러진 것과 같은 부실경영의 반복을 차단할 뿐 아니라, 무한경쟁시대에 생존하기 위한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 미래지향적인 각종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결국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는 방대한 공적자금의 금융기관 투입을 통해 부실금융기관을 정리하고 문제되는 기업에 대해 워크 아웃 을 실시해온 것과 과거의 과잉투자와 중복투자 문제를 정리하고, 재벌기업의 취약한 재무구조 개선과 핵심역량 제고를 위한 빅딜 은 과거 유산정리를 위한 구조조정이었다. 하기야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산업의 예를 보면 과연 빅딜이 해당기업의 재무구조 개선과 핵심역량 제고라는 목적달성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의문시되는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과거 유산정리를 위한 제반 조치들과 함께,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재무제표 작성기준의 국제화, 연결재무제표 작성의 의무화, 사외이사제도 도입과 소액주주의 권익 보호 등을 통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취해진 각종 조치들은 좀 더 미래지향적인 경쟁력제고에 필요한 구조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간과해선 안되는 것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경영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필요한 제도의 도입은 아직도 미진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시장기능에 의한 상시퇴출 제도의 기반이 될 기업도산 관련 새 법은 논의단계에 머물러 있다.

▼구조조정 진척상황에 초점을▼

따라서 이 시점에서 기업구조조정에 관한 올바른 논의의 초점은 그동안 이룩하려 했던 구조조정의 당초 목적달성 여부와 그 진척 상황에 맞추어져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기업의 목표 부채비율과 총액출자제한에 관한 논의는 반(反)재벌, 친(親)재벌과 같은 이념적 측면이나 단순한 경기부양 측면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어 목적의식 상실에 의한 우를 범하게 될까 우려된다. 앞으로 제2, 제3의 경제위기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점검 할 때이다.

사공일(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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