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10]전봉준과 동학

  • 입력 2001년 6월 1일 21시 20분


《우리는 동학혁명의 주역 전봉준(全琫準)을 거론할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그가 동학교도로서 고부(古阜)의 접주(接主·동학교도들의 지역 책임자)였다는 것을 전제로 해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가 동학교도였다거나 접주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일차 사료(史料)는 어디에도 없다. 전봉준을 동학교도로 기록한 최초의 저술은 아마도 장도빈(張道斌)의 ‘갑오동학란과 전봉준’(덕흥서림·1926)인 것으로 보이며, 천도교 측 기록으로서는 이돈화(李敦化)의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천도교중앙종리원·1933)가 전봉준을 동학교도로 서술하고 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연재순서▼

1. 한민족의 형성
2. 화랑과 상무정신
3. 첨성대의 실체
4.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
5. 김성일은 충신이었다
6. 성삼문과 신숙주
7. 서낭당에 얽힌 비밀
8. 당쟁과 식민지사학
9. 의자왕과 3000궁녀
10. 전봉준과 동학

종교학자인 폴 존슨에 따르면, 한 인간이 어떤 종교의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1)종교적 체험을 겪은 후 (2)그 종교에 귀의(歸依)하고 (3)기도하고 헌신하면서 (4)예배(ceremony)에 참석한 연후에야 완전한 신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전봉준의 경우에는 이 네 단계의 어느 경우도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다.

전봉준이 진실로 열렬한 동학교도였다면 고부민란 이후 그가 체포될 때까지 그의 손으로 작성된 그 숱한 격문과 대정부요구서(對政府要求書·폐정개혁안)에는 왜 동학을 옹호하는 구절이 한 마디도 없을까?

▼종교 옹호 논리적 비약▼

어떤 인물이 어떤 종교를 믿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 종교를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있는가? 그의 입교 의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확인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전봉준을 동학교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러한 나의 물음에 대해 전봉준이 동학교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논리는 전봉준이 문초를 받으면서 동학을 ‘몹시 좋아했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이는 곧 그가 동학교도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약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것’과 ‘믿음’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 종교를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교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가 그 종교를 신봉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학자 중 박종홍(朴鍾鴻)이나 조지훈(趙芝薰)만큼 동학을 좋아한 사람도 없었으나, 그들이 천도교도는 아니었다. 성서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말할 때 ‘A는 B이다’라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서 ‘B는 A이다’라는 논리가 반드시 성립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전봉준에 대한 논의는 한술 더 떠서 그가 고부 접주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본시 접(接)이라 함은 동학교문의 고유 용어가 아니라 그 당시의 서당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서당의 선생(훈장)을 접장(接長) 또는 접주라고 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교사를 접장이라고 부르는 용어가 일부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접장은 '서당의 훈장'을 의미▼

전봉준이 동학 접주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논거는 그가 법정에서 신문받을 때, “너는 고부에 주접(住接)할 때에 동학을 가르쳤는가?(汝住接古阜時 不行敎東學乎)”라는 구절이다. 동학 교단과 일부 학자들은 위의 구절에서 ‘여주접고부시(汝住接古阜時)’를 “네가 고부의 접주로 있을 때”라고 해석하면서, 이미 그가 접주임을 전제로 해 재판이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여주접고부시(汝住接古阜時)’란 말은 “네가 고부에 머물러 살 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대목을 해독하기 위해 자전(字典)을 펴볼 것이 아니라 국어사전을 보았어야 했다. ‘주접(住接)’이라는 단어는 ‘한때 머물러 산다’는 뜻으로 한글중사전에도 나온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의 지적처럼 역사학자가 문헌을 정확히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질문에 대해 전봉준이 “나는 서당의 선생으로서 아동을 가르쳤을 뿐 동학의 교리를 준행하거나 가르친 바가 없다(矣身訓導 如干童蒙 無東學行敎之事)”고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동학 교도도 아니고 접주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 어디에 있겠는가?

▼문헌해석 치명적 오류▼

아버지인 전창혁(全彰赫)이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에게 매맞아 죽은 개인적인 원한과 탐관오리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어 무장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으로서는 당시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학의 조직과 세력을 외면하고서는 봉기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법정 진술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남들의 등에 밀려”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부상했을 때 그는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겠지만, 동학을 하나의 종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전봉준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신자요 접주였다면 그의 직업을 묻는 법정 진술에서 ‘접주’라고 대답했어야지 ‘선비’라고 대답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전봉준이 동학 교도가 아니었다거나 접주가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갑오혁명은 농민들의 봉기▼

왜냐하면 1894년의 일련의 사건들, 즉 갑오농민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전봉준의 교도 접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 일련의 투쟁이 농민혁명이 아니라 종교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호교론(護敎論)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갑오농민혁명에서는 민란의 요소가 독립 변수였고 종교는 종속 변수일 뿐이다.

요컨대 전봉준은 접주이기는 커녕 동학교도였다는 것이 사료로 입증되지 않는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曲筆)에 의해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전봉준이 동학도였다거나, 아니면 고부의 접주였다는 주장은 그가 동학을 주요 변수로 해 전개된 혁명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선입견에서 나온 성급한 단정이라고 본다.

아니면 영웅과 자신들의 동일시(同一視)를 통해 효과를 얻으려는 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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