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강간 살해’ 혐의 피고인으로 73년 6월 서울고법의 항소심 법정에 섰던 정진석씨(가명·67)가 28년 만인 4일 오후 3시 다시 서울고법 법정에 섰다.》
28년 전 수의를 입고 포승에 묶였던 30대 후반의 피고인은 양복을 어색하게 차려 입고 드문 머리가 하얗게 센 60대 후반의 노인이 돼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반드시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정씨의 재심청구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5부가 공개 심문을 결정한 지난달 중순 정씨는 이렇게 말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8년 전 “증인을 다시 심문해 달라”는 고 이범열(李範烈) 변호사와 자신의 ‘애원’을 배척했던 서울고법이 자신의 ‘억울한 사연’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는 자체가 너무나 큰 감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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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이날 법정에서 변호인이 애원하다시피 얻어낸 5분간의 진술시간을 스스럼없이 반납한 것은 의외였다. 무척이나 할 말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틀 동안 엄지손가락 두개만을 이용해 타이핑한 A4용지 두 장짜리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진술서에서 그는 이렇게 염원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사건의 진범을 비롯해 고문자도 조작자도, 재판을 잘못한 법관들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모두 다 용서하고 저도 평안히 눈을 감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씨의 ‘진술서’ 이곳 저곳에는 72년10월 ‘범인’으로 검거된 이후 29년 동안 쌓인 마음의 앙금이 단단한 결정(結晶)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는 “당시 항소심은 내가 ‘조그만 여자 애를 좋아하는 변태 성욕자’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며 “검사의 구형대로 가장 완벽하고 합법적인 증거인멸인 ‘사형’을 선고하지 않은 것이 항소심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사건 당시 정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가 최근 진술을 뒤집은 이모씨(63·여·당시 이웃주민)를 이날 증인으로 불러 심문할 예정이었으나 이씨의 남편이 3일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25일로 연기됐다.
재심 여부를 결정할 첫걸음인 이날 재판은 10분 만에 끝났다.
“제가 진술서를 그냥 낼 것이 아니라 판사님께 직접 읽어 드릴 걸 그랬나요?”
재판이 시작되기 전 ‘정의’를 외치며 재판부에 감사를 아끼지 않았던 정씨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해 버린 5분을 내내 아쉬워하며 법정을 나섰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