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일그러진 영웅들

  • 입력 2001년 6월 6일 19시 08분


<석대가 도시락을 책상 위로 올려놓자 아이들도 모두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대여섯 명이 무언가를 들고 석대에게 갔다. 그애들이 석대의 책상 위에 내려놓은 걸 보니 찐 고구마와 달걀, 볶은 땅콩, 사과 같은 것들이었다. 뒤이어 맨 앞줄의 아이 하나가 사기컵에 물을 떠다 공손히 놓는 것까지 모두가 소풍 가서 담임선생님께 하듯 했다.>

소설의 주인공 엄석대(嚴石大). 그의 힘은 이렇게 막강했다. 이문열(李文烈)의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한 작은 읍(邑)의 국민학교 5학년 교실에서 펼쳐지는 ‘힘’의 얘기다. 그 엄석대의 엄청난 힘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그리고 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힘 또는 권력의 속성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가 보다.

민주당 초재선 의원들이 앞장선 정풍운동의 핵심은 비선(秘線)조직과의 싸움이다. 개각을 비롯한 정부의 인사, 특히 정부 산하단체나 공기업 임원의 낙하산 인사에는 항상 비공식 라인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사시스템이 흐트러지는 원인도 바로 그 ‘힘’의 작용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과 맞서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 ‘힘’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어느 최고위원이 요즘 한창 뜨는 것이다. 반면 그 ‘힘’의 질서 속으로 편입된 한 젊은 의원도 또 다른 의미에서 뜨고 있다.

<하지만 싸운다는 것도 실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그러했고… 뚜렷한 것은 다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뿐-어른들 식으로 표현한다면, 불합리와 폭력에 기초한 어떤 거대한 불의가 존재한다는 확신뿐….>

여권쇄신을 부르짖는 초재선 의원들은 “이런 시스템과 뿌리를 그냥 두고는 언제든지 안동수장관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의원은 “비공식 라인의 작동을 방치한 대통령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그의 힘 중에서 싸움솜씨에 못지 않게 많은 부분이 담임선생의 신임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소검사 숙제검사에 심지어는 처벌권까지 석대에게 위임하는 담임선생의 그 눈먼 신임이 그의 폭력에 합법성을 부여해 그를 그토록 강력하게 우리 위에 군림하게 했다.>

이번 주초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도 몇몇 최고위원들은 인적쇄신을 되풀이 강조했다. 여기에는 비공식 라인을 정리하라는 뜻도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무런 확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분의 뜻을 충분히 들은 만큼 앞으로 적절히 판단해 처리하겠다”고만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기 바쁘게 교무실로 담임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 별로 비겁한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없이… 그동안 내가 보고 들은 그 비슷한 사례들(엄석대의 비리)을 모조리 얘기했다. 서울서 온 아이의 똑똑함을 여지없이 보여준 셈이었지만 담임선생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알았어. 돌아가. 내 이따가 알아보지.>

김 대통령은 국정개혁에 대한 구상을 13일 밝히겠다고 했다. 성명파 의원들도 일단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냥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는지 엊그제 다시 모여 또 한번 ‘인적쇄신’을 촉구했다. “토론은 당내에서 해야지 밖에서부터 얘기해 분열로 비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대통령의 ‘경고 말씀’을 들은 터이지만 아무래도 못미더웠는가 보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시 ‘인적쇄신’의 절박성을 ‘밖에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벽이 두껍고 단단하다는 뜻이다.

<저 화려한 역사책의 갈피에서와는 달리 우리 반(班)의 혁명은 갑작스럽고 약간 엉뚱한 방향에서 왔다. 그 이듬해 담임선생이 갈린 지 채 한 달도 안돼 그렇게도 굳건해 보였던 석대의 왕국은 겨우 한나절로 산산조각이 나고….>

소설에서는 담임이 바뀌었지만 현실에서는 담임이 바뀌지 않고도 큰 개혁과 쇄신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싶다.

다음주 수요일, ‘13일의 결단’을 기대해 본다.

<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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