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만년조연' 김경애씨 "봉사자로선 주연이고 싶어요"

  • 입력 2001년 6월 10일 18시 57분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탤런트 김경애씨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탤런트 김경애씨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지 않느냐.”

“오빠∼,(흑흑).”

눈물 없이 볼 수 없다는 전통 악극 ‘홍도야 울지 마라’의 클라이맥스 부분.

8일 서울 강서노인종합복지관 내 노인극단 소속 할아버지, 할머니 10여명이 무대 위에서 저마다 맡은 역을 연기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때맞춰 눈물을 자연스럽게 흘리는 솜씨가 초보 수준은 넘어선 것 같다. ‘늦깎이’ 연기에 신바람난 ‘노인 배우’들의 한마당. 이들의 뒤에는 “연기자로서는 만년 조연이었지만 봉사자로서는 주연이고 싶다”는 한 50대 현역 탤런트의 헌신이 숨어 있다.

예명이 김용진인 여자 탤런트 김경애씨(56). 연기경력만 따지면 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 64학번) 때부터 무대에 오른 이력을 합쳐 벌써 36년째의 ‘베테랑’. 태조 왕건, 장희빈, 용의 눈물 등 각종 TV사극에서 그는 신들린 무당역을 도맡았으며 최근 개봉된 영화 ‘파이란’에서는 주인공 최민식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구멍가게 아줌마 역으로 열연했다.

김씨가 강서 노인극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4월경 화곡동으로 이사하면서부터. 우연히 지역소식지에 나온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을 살펴보던 김씨는 자신의 전공과 경력을 살려 노인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막내딸로) 태어나서 제대로 효도 한 번 못 해보고 부모님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게 아직까지 마음 한 구석에 짐으로 남아 있어요. 부모님께 못다 한 효를 동네 어른들에게 대신하고 싶었죠.”

강의 초반에 “도저히 대사는 못 외우겠다”고 두 손을 들어버린 성급한 ‘학생’도 많았지만 차츰 연기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김씨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 ‘단원’은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힌 채 “네 이 년!, 어서 말하지 못해”라고 큰 목소리로 대사 연습을 하는 바람에 손녀가 울어버려 애먹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도 중얼중얼 대사를 읊고 다녀 치매환자로 오해를 받은 또 다른 단원의 얘기도 있다.

최연장자인 최윤옥 할머니(77)는 “어느덧 서로를 ‘홍도’ ‘오라버니’ 등 극중 역할로 부르게 됐다”며 “무료하게 앉아 시간만 때우기보다는 연극 무대에 서니 몇 십년은 젊어진 것 같다”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노인 배우’들을 모신 자녀들도 부모들의 변화에 고무됐다. 이들은 “우리 부모님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다”며 공연 때마다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연기력이 탄탄해진 단원들은 그동안 서울 내 복지시설 등을 20여차례 순회 방문하며 관객들과 애환을 나누는 ‘수준’에까지 올라섰다.

김씨에게 남은 꿈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공연을 갖는 일. 연극영화과 출신의 남편(이문재·60)이 연출을 맡고 인터넷 방송 PD, 카메라 감독, 연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세 아들이 자신과 함께 한 무대에 서는 ‘그날’을 위해 그는 오늘도 무대 안팎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김현진기자>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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