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강석경 '여자의 적은 여자'

  • 입력 2001년 6월 15일 18시 37분


요즘 신화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지만 독창적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교양을 갖추는 정도로 그치기 쉽다. 벌써 9년 전에 초판이 발행된 스테디셀러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진 시노다 볼린 지음·조주현과 조명덕 옮김·또하나의문화)은 세계 신화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속에 살아있는 무엇임을 느끼게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

인간처럼 장점과 약점을 두루 가진 그리스 신들을 분석하여 이 신화의 인물들이 3000년 동안 각 여성의 내면에 잠정적으로 존재해온 원형이라는 것을 밝히고 자기성찰을 촉구하는 지혜로운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 진 시노다 볼린은 심리학에 원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융 학파의 정신과 의사로서 20년간 임상을 통해 알게 된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리스 여신들을 반영하여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하도록 명쾌하게 길을 열어준다. 저자는 질투심과 원한으로 가득 찬 여성환자에게서 제우스의 아내이며 결혼의 수호신인 헤라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았다.

잘 알려진대로 바람둥이 제우스는 수없이 외도하며 헤라의 복수심을 자극했다. 헤라는 레토가 제우스의 소생인 아폴로를 낳을 때 저주를 내려 9일 동안 고통 속에서 헤매도록 하고, 제우스에게 여자가 생길 때마다 상대 여성에게 분노를 쏟았다. 남편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는 헤라 원형은 가부장 문화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면서 다른 여성들을 억압하기도 하고, 복수를 함으로써 여신들 중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헤라 원형은 한국같은 가부장 문화, 제도 중심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여성상담원이 상담보고서를 쓴 적이 있는데 남편의 외도 문제가 생겼을 때 한국여성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상대 여자에 대한 증오라고 지적했다. 남편은 유혹을 당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상대 여자만 단죄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헤라의 반응인데 남편의 상대에 대한 여자들의 적대감은 지식 정도에 상관없이 한결같다. 여기서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아내, 엄마, 딸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을 대표하는 헤라, 데미테르, 페르세포네를 ‘상처받기 쉬운 여신들’로 분류하고 사냥과 달의 수호신 아르테미스, 지혜와 영웅들의 수호신 아테나, 화로의 수호신 헤스티아를 ‘처녀여신들’로 나누었다.

거친 자연을 좋아하고 고집 센 개인주의자며 자기 성취욕이 강하다면 당신은 아르테미스 원형을 가지고 있다. 전략적이며 마음보다는 머리로 움직이는 논리형이지만 권위적인 아버지를 추종하고 가부장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당신은 아테나의 원형을 갖고 있다. 집을 신전처럼 지키며 고독하고 명상적인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헤스티아 유형에 가깝다.

이 책의 장점은 그리스 여신들을 박물관에 진열된 차가운 조각이 아니라 생동적이고 현실적인 여성으로 재현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폭넓게 성찰하도록 해준다는 점에 있다.

강석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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