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각양각색의 주장을 실은 글이 도처에 넘친다. 반면에 이들을 아우르는 열린 말은 부족하다. 언쟁은 있을지언정 정직한 대화는 듣기 힘들다. ‘실어증의 시대’라는 서글픈 말은 바로 이런 세태를 꼬집는다.
이 책은 각계 지성과 저명 인사들의 대담집이다. 글로써 시대를 대표해온 사람들이 속내를 드러낸 말을 녹취하고 정리한 것이다. 글이 아닌 목소리로 만난다는 기획취지는 대화상실의 비정상적인 세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대담에 참여한 26명은 김춘수(시인), 이문열 최인호(소설가), 김우창 김화영(비평가), 최장집(정치) 이강숙(음악) 최재천(생물) 등 학자, 화가, 종교인, 기업인, 헌책방 주인까지 망라됐다.
이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장시간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큰 주제는 ‘삶 예술 현실 이성’이었지만 전공서에나 나옴직한 거창한 담론을 벌인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일상속의 애환과 삶의 진실을 담은 소박한 말 속에 사금파리처럼 생의 진실이 반짝인다.
생물학자와 시인은 강원도 산골에서 보낸 유년기 추억을 나누며 “우리를 키운 건 8할이 가시고기였다”고 말한다. 학계의 선 후배는 미국을 상징하는 오렌지 쥬스에서 ‘하늘나라 음식’을 맛봤던 문화적 충격을 떠올리기도 한다.
소설가 이윤기씨와 철학도인 딸 다희씨가 나눈 ‘대담’은 정겨움을 넘어선다. “아빠는 어쩌다 이런 돈 안되는 인문학에 빠져드셨어요?” “인문학도 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가시밭길이다. 좋은 끝은 반드시 가시밭길 저 너머에만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특징은 ‘대담자 조합의 의외성’과 이를 통한 ‘익숙한 주제의 낯선 결합’에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노학자와 이제 막 필력을 과시하는 소장학자가 만나고, 중문학자와 디지털학자, 음악학자와 미술가, 스님과 목사가 흉금을 터놓는다.
이런 탈(脫)세대, 간(間)학문, 혼(混)영역의 이질적인 마주침은 의외의 ‘불꽃’을 일으킨다.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중문학)와 김주환 교수(연세대 신문방송학)는 일본 만화영화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하이브리드’(잡종) 캐릭터의 근원을 중국 신화 ‘산해경(山海經)’에서 발견한다거나, 양명수 목사와 도법 스님이 다른 구도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종교는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라는데 기꺼이 합의하는 것이 그렇다.
생명의 탄생을 찬양하는 최재천 교수(서울대 생물학과)와 죽음을 노래하던 최승호 시인은 어떤가. 얼핏 불협화음 같은 두 사람의 결합은 “죽음 역시 삶 속에 있고, 삶은 죽음을 끌어안을 줄 안다”는 선(禪)적 합일을 이룬다.
‘불꽃’이 만든 지혜의 결정을 한데 모으면 시대를 비추는 ‘성찰의 거울’이 된다. 이 책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유한 것은 편집진의 자찬(自讚)만은 아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방패로 괴물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듯, 이 책은 삶을 화석화시키는 주의와 주장을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정승처럼 벌어야 정승처럼 쓸 수 있다.”(소설가 최인호·윤윤수 필라코리아 대표) “사람은 땅을 닮고, 땅은 사람을 닮는다.”(풍수학자 최창조 교수·‘한국의 주체성’ 저자 탁석산) 같은 결론은 이런 점에서 적잖은 울림을 남긴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대담 참가자들이 타인과의 대화를 위해 ‘골짜기’로 내려올 줄 아는 너그러운 지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지식인들에게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다. 까마득한 후배학자의 10분이 넘게 더듬거리는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에 이야기의 진폭을 확장하는 김우창 교수의 대화법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한가지 아쉬운 점은 책 제목이 너무 튄다는 것이다. 제목은 무슨 내용을 다룬 것인지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우리 전통 무가(巫歌) 가사에서 따왔다는 이 책 제목만 보아서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기 어렵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