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조광조의 흥망

  • 입력 2001년 6월 15일 18시 41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비리에 대해 분노하며 도전하고 직언하는 무리는 있게 마련인데 이러한 개혁가들의 삶은 늘 북풍한설 앞에 선 사람처럼 고독하고 위태로웠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정암(靜庵) 조광조(1482-1519)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영변(寧邊)에 살면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인근에 유배되어 있던 김굉필(金宏弼)을 만나게 된다. 강직한 성품의 김굉필은 조광조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해주었다. 대부분의 국외자들이 그렇듯이 당시의 사림(士林)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자들이었고 기성에 대한 강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김굉필과의 만남은 개혁가로서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산군(燕山君)이라고 하는 미증유의 폭군 시대가 가고

소위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정변이 있었으나 개혁의 주체가 논공 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조광조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광조가 진사 회시(會試)와 알성시(謁聖試)에 장원 급제하고 조정의 각광을 받으면서 33세에 사간원 정언(正言)에 발탁되어 언로(言路)를 통한 개혁을 추진했을 때 이미 폭풍은 잉태되어 있었다.

그의 말을 빌어 그 시대를 표현하면, 왕(중종)이 즉위한 지 이미 오래이나 선치(善治)의 공효(功效)를 보지 못하여 빈번하게 재변(災變)이 나타나고, 선비의 뜻과 행실이 날로 무너졌다.

이러한 난세에 조광조가 대사헌의 중책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소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개혁을 추진했던 조광조의 진심을 의심하는 역사적 시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광조의 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첫째로, 조광조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개혁은 개혁가의 의지와 지혜의 상승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상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자학적 명리에 지나치리 만큼 집착했다.

그는 맨 먼저 소격서(昭格署·왕실에서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관청)의 혁파를 주장했다. 유학자인 그로서는 노장(老莊)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유학이 바로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성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중종 5년(1510)부터 기묘사화(己卯士禍)까지(1519)의 9년 동안에 조광조가 소격서를 폐지하라는 상소를 265회나 올렸다는 사실은 당시 그가 이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했으며, 그 선악과 공과를 떠나 전통과 구습의 개혁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조광조는 공·맹(孔·孟)의 군자·소인(君子·小人)의 단순 논리로써 세상을 읽으려 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인재를 특채할 것을 요구한 점이다.

그는 왕이 정치적 위업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른 인재를 등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림을 특채해야 한다고 왕에게 주청했다. 그의 주장은 관철되어 28명의 현량과 급제자가 배출됐다.

그가 기성 세력의 안주를 혐오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현량과를 요구한 것은 또 다른 특권층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셋째로, 여기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의 개혁이 지나치게 질주(疾走)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공자(孔子)의 말을 빌어 “나도 3년이면 묵은 폐단을 척결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는 너무 조급했다. 대개의 경우 혁명의 질주는 인간적인 교만과 독선에서 온다.

격변기의 격앙된 정서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의 다그침은 주군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국민 정서를 지나치게 앞지르고 있었다. 주군의 총애를 받을수록 그는 더욱 겸손하고 신중했어야 했다. 그는 아마도 조정 대신 중 절반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 받았을 수도 있다.

조광조의 비현실적 상황 인식에서 비롯된 오만과 무모함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정국 공신(靖國功臣) 76명의 훈작(勳爵)을 삭탈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무모한 도전이었고 반대파로부터 생사를 건 저항을 받았다.

그는 반정 공신들을 무식하고 간교한 소인이라고 몰아붙였다. 혁명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속이다. 과격한 혁명은 많은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음으로써 불필요한 적을 만들게 마련이다.

자신의 힘이 비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하게 기득권 세력을 공격한 것은 그 동기가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그가 지혜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다 썩었는데 나만은 깨끗하다’(擧世皆濁 我獨淸)는 식의 인식은 그 자신이 이미 특권과 선민 의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책임자를 파직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1년(1515)에 7차례 올렸고, 그가 예조정랑에 올라 대사헌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1515년부터 1519년까지의 4년 동안에 개혁 상소를 300번이나 올림으로써 그의 주군을 피곤케 했다. 그가 아마도 이 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개혁을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3,4일에 한번 꼴로 상소를 받아든 중종이 끝내는 조광조에 대하여 넌덜머리를 느꼈다는 것은 세속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넷째로, 위와 같은 개혁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 조광조는 살아 남는 지혜를 갖추지 못했다. 그는 선의의 야망에 걸맞은 경륜을 갖추지 못했기에 37세의 젊은 나이에 꿈도 이루어보지도 못한 채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는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성급하고 경솔한 사람이었다. 그가 진실로 공자의 뜻을 관철하고 싶었다면 그는 차라리 ‘무도한 사회에서는 몸을 숨기라’(無道則隱)는 공자의 말씀을 따랐어야 했다. 그가 위훈 삭제를 요구한 날로부터 4일이 지나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 옥사를 통해 95명이 화를 입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가 불과 4일 앞도 내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개혁가라고 해서 절의(節義)와 죽음만이 최고의 가치요, 미덕일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조광조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인물은 아마도 이율곡(李栗谷)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광조가 그 높은 지조와 행실에도 불구하고 위로는 왕을 설득하지 못했고, 아래로는 비방으로부터 자신을 보전하지 못함으로써 후세의 지탄을 면치 못한 것을 탓한 것을 보면 율곡도 그를 높이 평가한 것 같지는 않다.

역사에 명멸했던 수많은 혁명가들은 그가 이끌던 혁명의 와중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대는 엄청난 반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 많은 아픔을 겪게 된다. 이럴 경우 그의 죽음이 그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조광조의 죽음에서 프랑스혁명기의 로베스피에르의 흔적을 엿보게 된다. 충직했고, 청렴결백했고,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고, 질주했고, 젊은 나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혁명가에게 죽음이 욕된 것은 아니지만,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죽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 죽는 것은 결코 칭송 받을 일이 아니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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