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철학사전’에는 존재, 이성, 이해, 문화, 언어, 자아 등 철학의 가장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개념 12항목이 담겨있다.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각 주제에 대해 1년 가까이 연구했고 결과물은 매년 수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발표됐다. 토론 과정을 거쳐 수정, 정리된 개념은 항목 당 A4용지로 20∼30매 분량이 된다. 일반적인 사전 처럼 한 항목을 몇줄로 간략하게 정의하거나 설명해놓은 것으로 예상하면 오산이다. 이를 사전으로 편집하기까지는 다시 1년 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우리말로 철학하기, 주체적으로 사유하기’라는 전제 아래 우리사상연구소가 사전 편찬을 기획한 것은 1997년. 철학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서구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소개하는 수준에 그칠뿐 제대로된 ‘우리’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 카톨릭대 철학과 신승환 교수는 “철학 개념의 기원과 유래가 어찌됐든, 이를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말로 고민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철학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존재’의 개념정립을 맡은 한국외대 철학과 이기상 교수는 서양의 편협한 철학적 관점에 대해 비판하면서 한국적 맥락에서 ‘존재’를 정의내린다. 서양에서는 ‘존재’의 테두리 안에 속하는 것만을 ‘있다’고 규정하고 현존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단정짓는 반면 한국에서는 ‘존재’의 테두리 밖에도 ‘무(無)’, ‘공(空)’, ‘허(虛)’가 엄연히 ‘있다’고 본다는 것. 따라서 ‘무(無)’가 철저히 배제된 협소한 의미의 ‘존재’보다 ‘무(無)’까지도 포용하는 포괄적 의미의 ‘있음’이 올바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사전 편찬위원장이기도 한 이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우리 방식대로의 ‘철학함’은 없고 남이 ‘철학한’ 결과로 제시한 ‘철학’이 존재했다”면서 “철학 역시 식민지성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인 성염 교수(서강대 철학)는 “기존의 철학사전은 서구 이론을 그대로 배낀 것에 불과해 난해한 표현들이 많았다”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사전을 찾지만 오히려 사전에 쓰인 표현이 더 어려워 다시 사전을 찾아야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쉬운 언어로 집필된 이 사전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철학자들의 공감대를 반영하고 있다. 1권에 명시된 12항목을 포함, 60항목의 개념을 선정한 우리사상연구소는 향후 5년에 걸쳐 5권짜리 전집을 펴낼 계획이다. 2권에는 생명, 신, 예술, 상징, 역사, 시간, 무(無) 등 12항목이 수록된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