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세월은 흘러 선동렬은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으로, 박노준은 SBS 해설위원으로 서로의 길을 가고 있지만 21년전 이들이 까까머리 고교선수로 격돌했을 때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동대문야구장은 암표상이 매일 빼곡하게 진을 쳤고 TV 카메라는 고교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잡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오빠부대’의 원조인 단발머리 여고생들의 비명에 가까운 환호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관련기사▼ |
이런 가운데 선동렬과 박노준은 80년 가을 운명의 한판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주위의 신경전과는 달리 느긋했다. 1년 선배로 졸업반이었던 선동렬은 경기전 박노준을 만나 “야 하나만 맞춰줘라. 안타 1개만 치면 나도 이번 대회서 타격 3위 안에 들 수 있어”라며 애교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박노준도 “오늘 경기만 져 준다면야 그깟 안타야 몇개도 줄 수 있죠”라며 화답했다.
박노준이 투수와 타격, 그리고 주루와 수비를 겸비한 만능선수로, 선동렬은 최고의 투수로만 알려져 있지만 당시 선동렬은 팀의 5번타자로서 타격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승부는 타자 박노준의 ‘창’과 투수 선동렬의 ‘방패’ 대결에서 판가름이 나고 말았다. 문제는 천하의 선동렬도 1년 내내 혼자서 거의 완투를 하다시피 하니 대미를 장식하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선 체력이 소진돼 버린 것.
특히 이상군이 버틴 천안북일고와의 준결승에서 너무 힘을 뺀 게 치명적이었다.
반면 선린상고는 박노준 외에도 그와 어깨를 겨루는 동기생 스타 김건우가 있었고 1년 선배인 나성국까지 3명이 번갈아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결국 선린상고는 3대1의 마운드 인해전술에서 우위를 보였고 이날의 영웅 박노준은 선동렬을 상대로 승부에 쐐기를 밖는 2점홈런을 포함해 3안타 3타점의 맹타로 팀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박노준은 “선동렬 선배의 슬라이더는 이미 그 당시에 언터처블 수준이었다”면서도 “그렇다고 기가 죽을 내가 아니다. 미리 구질을 예상한 노려치기를 했는데 직구가 들어와 홈런을 날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선동렬은 아직도 그때의 완투패를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후 20년 가까이 더 선수생활을 했지만 그때의 패배가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 타자에게 홈런 포함해 3안타 3타점을 맞은 경기가 이후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고 말했다.
그러나 프로에 와선 박노준은 예전의 화려한 명성과 재능에 비해 그리 오래 선수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선동렬은 이때의 패배를 거울삼아 ‘국보급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장환수기자>zangpab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