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조훈현-조치훈 LG배 16강전

  • 입력 2001년 6월 17일 19시 31분


◇"50집 싸움서 10집팻감 쓰다니…"

“허, 50집짜리 패싸움을 하다가 10집짜리 팻감을 쓰나.”

검토실의 최명훈 8단이 탄식하듯 한마디 내뱉는다.

제6회 LG배 세계기왕전 16강전 조훈현 9단과 조치훈 9단의 대결. 두 기사의 대결은 LG배에서만 무려 4번째. 지난해에도 16강에서 만나 조훈현 9단이 승리했다.

지난해 두 기사는 모두 최악의 해를 보냈다. 조치훈 9단은 메이진(名人)위를 잃고 무관으로 전락했으며 조훈현 9단도 국수위를 잃고 성적도 29승 27패로 프로기사 생활 중 최악이었다.

하지만 현재 두 기사의 처지는 천양지차. 조훈현 9단은 후지쓰배 4강 진출, TV아시아바둑 2연패, 국수위 탈환 등 각 기전에서 맹활약하고 있지만 조치훈 9단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채 잊혀진 인물이 돼가고 있다.

항상 부스스한 머리에 다듬지 않은 콧수염, 그리고 불그죽죽한 낯빛으로 대국실에 들어서는 조치훈 9단의 얼굴엔 어딘지 승부를 앞둔 긴장감이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현 국면(장면도)은 팽팽하다. 중앙 흑이 패에 걸려있어 백을 든 조치훈 9단이 유리해보인다는 검토실의 중론.

이 패싸움의 크기는 안팎으로 따져 50집이나 된다. 흑 1은 자체 팻감. 이 때 백 2로 이은 것이 실수. 이 수로는 ‘가’로 패를 해소하고 흑이 2로 백 4점을 잡을 때 백 ‘나’로 뻗어 우하귀를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어 흑 ‘다’로 좌상귀 백을 잡을 때 백 ‘라’로 다가서 흑 넉 점을 공격하면 백의 흐름이 좋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으로 패를 되때릴 때 백 4가 검토실 기사들의 눈을 의심하게 한 수. 최 8단은 이 대목에서 탄식을 거듭했다. 4, 6으로 뚫는 것은 얼핏 커보이지만 박약한 흑 귀를 강화시켜준 점을 감안하면 고작 10집 남짓한 크기에 불과했다. 차라리 백 ‘나’로 귀를 팻감을 쓰는 것만 못했다는 것.

흑이 5로 빵때려 패를 해소하고 7, 9를 두어서는 팽팽하던 국세가 갑자기 20집이상 차이나는 바둑이 돼버렸다.

상대의 바늘 끝만한 허점을 찔러 승기를 잡던 조치훈 9단이 전성기 시절 보여준 처절함과 지독함은 다 어디 갔을까. 이날 그의 바둑에선 승부의 기세와 긴장감이 어느 한순간 실종돼 있었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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