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대학-안산 캠퍼스 개원의 해’ 기념행사로 열린 강연회 ‘라마마 40년의 이상과 성공’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14일 서울 남산 동랑예술센터(옛 드라마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 중 “팜플렛에 ‘젊게’ 나온 사진은 20여년 전 모습”이라며 “몸이 너무 무거워졌다”며 계속 걱정했다. 하지만 여유 있는 웃음에 열정적으로 빛나는 눈빛은 팔순을 넘긴 나이로 믿기지 않을 만큼 정력적인 것이었다.
세계 실험극계의 대모(代母)로 알려진 스튜어트의 직업은 원래 의상 디자이너였다. 1961년 10월 연극 극본을 쓰는 그의 수양 형제를 돕기 위해 한 건물의 지하층을 빌려 카페를 연 것이 연극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그의 카페는 무대가 없어 공연을 못하는 가난한 연극인의 극장이 됐고 스튜어트는 ‘마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느 날 윤락을 한다는 신고에 영장을 들고 찾아온 관리가 그에게 이름을 묻자 누군가 마마라고 했고, 이름도 없던 이 공간은 ‘라마마 극장’이 돼 버렸다.
“40년. (고개를 설래 설래 젓으며)…. 라마마 극장과 연극이 그 긴 세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 못했습니다. 허가 없이 운영한다는 이유로 극장이 폐쇄되고 감옥에서 하루 자기도 했어요.”
뉴욕 맨하탄의 오프 브로드웨이에 속하는 라마마 극장에서는 지난 40년간 1800여 편의 다양한 실험극들이 공연됐다. 여기에는 세계 70여개 국에서 초청된 해외 아티스트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블루맨’ 그룹이 여기에서 시작됐고 닉 놀테,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등 지금 할리우드의 쟁쟁한 스타들이 이 무대를 거쳐갔다. 제3세계 연극 무용을 미국에 소개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공연계가 ‘마마’에게 진 빚도 적지 않다. 스튜어트는 62년 강월도 작 ‘머리 사냥’을 시작으로 유덕형 안민수 홍신자 등의 작품 30여 편을 제작했고, 이를 라마마를 통해 미국에 소개했다.
라마마가 일으킨 기적과 성공의 비결은 뭘까. 스튜어트는 한 마디로 ‘사람들(People)’이라고 말했다.
“예술가, 관객…. 사람이 가장 중요해요. 난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예술가와 그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안내하는 일을 해왔어요.”
스튜어트는 40년 간의 헌신으로 95년 오프 브로드웨이 제작자로는 최초로 브로드웨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프린스턴대 브라운대 등 14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99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동랑연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의견이 많지만 아직 40주년 기념 계획을 확정하지 못했어요. 내가 젊게 사는 비결은 항상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요. 전 세계에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김갑식기자>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