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TV와 영화 '행복한 공생' 모색할때"

  • 입력 2001년 6월 20일 19시 06분


주말의 명화가 기다려지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처럼 동네 비디오 가게가 성업하기 이전, TV는 외국의 명화를 안방까지 날라다주는 고마운 매체였다. 오죽하면 ‘안방극장’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까.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에 상륙하는데 길면 몇 년씩 걸리고, 그것도 각종 제약에 묶여 여의치 못했던 시절, 시청자들은 TV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균형 잡힌 얼굴이며 줄리 앤드류스의 고운 목소리를 감상하는 행복을 덤으로 누렸었다.

그 ‘행복’이 요즘은 시들하다. 웬만한 영화는 슬리퍼 끌고 갈 수 있는 동네가게에 비디오로 나와 있고, 재미있는 새 영화들이 끊임없이 할리우드와 동시에 개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감독들이 만들어내는 한국영화도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영화는 넘쳐나고, 영화보기가 더 이상 ‘주례행사’도 아니며, 비디오방 DVD방 PC방까지 각종 ‘극장’들이 안방극장의 위상을 흔들고 있는 와중에 주말의 명화가 재미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한마디로 야무진 꿈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TV영화의 새로운 자리를 모색해보려는 시도들이 부쩍 눈에 띈다. 우선 ‘비상업 영화’의 공략이다. KBS는 매주 금요일 ‘단편영화전’(밤12시50분)을, EBS도 매주 일요일 ‘단편영화극장’(밤 12시반)을 각각 편성해 젊고 역량 있는 감독들의 작품과 공중파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또 하나는 과거로의 회귀이다. EBS는 매주 토요일 오전에 방영하던 ‘한국영화걸작선’을 일요일 밤 10시대로 옮겨 60년대 한국영화를 집중 소개해 왔다. MBC도 17일 역시 자정이 넘은 시각에 박노식 윤정희 주연의 ‘팔도사나이’를 방영해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낡은 영화필름이 훌륭한 TV 컨텐츠로 탈바꿈한 적이 있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 TV시대가 열리자 영화 관객이 절반으로 줄었다. 당시만 해도 TV에서는 영화를 방송하지 않았다. 그러다 60년대 중반 즈음 ABC방송이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TV에서 방영, 영화관객보다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 모으며 뉴미디어(TV)와 올드 미디어(영화)가 사이좋게 공생하는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TV는 영화에서 유례 없이 풍부한 컨텐츠를 얻었고, 할리우드의 낡은 필름들은 새로운 젖줄을 맞은 것이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미국 TV에서는 끊임없이 흘러간 영화들이 방송된다. 낡은 할리우드 영화만 전문으로 하는 케이블 TV채널이 있음은 물론이다. 대중과 멀기만 했던 단편영화를 과감히 편성하고, 오래된 필름을 뒤적이는 것에서 방송사들의 고민을 읽는다. 그 고민은 당연한 것이며, 변화의 방향은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계속,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직도 웬만한 시청자들이 깨어있는 자정 이전에는 30년 전 편성의 공식을 깨지 못하고 종전의 ‘명화극장류’ 영화들이 계속 방송되고 있다. 문제는 그 ‘명화’들에 대한 체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딱히 신작도, 그렇다고 명작도 아닌 영화를 놓고 방송사가 동네 비디오가게와 경쟁할 필요는 없다.

외국영화사들의 직배, 한국영화의 약진, 그리고 봇물을 이루는 비디오와 DVD로 무섭게 커지고 있는 영상 산업의 한 귀퉁이에서, 그만그만한 TV영화들이 아직도 주말의 밤 시간대를 고정적으로 붙들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TV 컨텐츠’로서의 영화를 진지하게 점검해볼 시점이 아닌가 한다.

박성희(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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