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껍데기는 가라

금강산을 오르는 길목에도 ‘우리식 대로 살아가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그 처절한 외침에서 대원군 시절의 척화(斥和), 외세배격을 떠올린다. 세계가 흘러가는 방향, 남들이 걷는 보편의 길, 그것을 뿌리치고 유독 ‘우리식’ ‘북조선식’ ‘항일유격대식’의 국가로 남자는 절규. 정녕 그 구호는 사회주의 낙원을 창출하고 있는가.

망국의 전야, 대원군이 외치던 소리는 그랬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요, 그들의 위협에 굴복해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서양 오랑캐의 침범에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이야말로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明治)정권의 선택과는 반대였다.

▼본질 흐리는 근본원리주의▼

모레면 6·25전쟁이 난 지 51년이 된다. 요즘 금강산 자락도 신록으로 푸르르다. 그러나 민둥산으로 이어지는 산하, 그리고 쇠락한 분위기의 온정리, 들녘에서 일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어쩐지 100년전의 묵은 필름을 펼치는 듯했다. 관광버스 속의 우리 민족대토론회(6·15남북정상회담 한돌 기념행사) 남측 참석자들은 들판의 북녘 동포들을 향해 마치 ‘외국인’처럼 손을 흔들어 주어야 했다.

북측 토론자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강고했다. 주체 자주(自主) 외세배격의 논리는 언제 들어도 빈틈이 없다. 북한을 오늘까지 끌고 온 그 논리는 앞으로도 북쪽을 지배할 것이다. ‘우리식대로’ ‘주체’얘기만을 끝없이 듣다보면 그것이 맞고 틀리고는 차치하고, 북한에선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어떤 원리주의로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본토 공산주의보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마오쩌둥이 실패한 그것보다 지독한 극단의 ‘공산원리주의’.

중화(中華)에 너무 취한 조선이 중국 정부의 패망을 마주하고는 ‘조선이야말로 소(小)중화’라고 외친 일이 있다. 그야말로 중원땅의 주인이 명나라에서 청으로 대체되어버린 냉엄한 국제질서 변화를 놓고도, 유교‘원리주의’ 중화‘근본주의’에 젖고 물든, 유교투성이의 선인들은 그런 식의 국가적 처방을 내고 있었다.

왜 유교도 공산주의도 이 땅에 들어오면 절대적이고 강퍅한 원리주의처럼 발전하는 것일까. 공자 맹자의 정신세계나 지향점보다도, 오히려 경전이나 해석에 함몰되어 다투고 헐뜯는 유교투성이가 되고 거기에 얽매여 허덕거리게 되는 것인가. 본거지보다 더 강고한 ‘소중화’의식에 빠지고, 중소(中蘇)보다 더 바람이 통하지 않는 ‘우리식 공산주의’가 되고 마는 것일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왔었다. 좀 지나친 제목이지만, 저자의 의도는 바로 형해화되고 각질화된, 생명력과 멀어진 유교투성이의 한국에 대한 비판이었다. 최근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예수는 없다’같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시 종교와 수행으로서의 본질, 알맹이는 엷어지고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교회와 목회자만 살찌고 흥행사처럼 비대해지는 풍조를 비판한 책들이다. 장승이나 단군상을 무너뜨리는 이른바 ‘기독근본주의’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한다.

어리석은 짓을 나타내는 말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것이 있다. 강을 건너다 배에서 칼을 빠뜨리고는, 뱃전에 빠진 자국을 새기고 칼을 찾는 미련한 짓을 말한다. 배는 흘러가는데 각주의 자리에 서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찾고 헤매는 우매함, 바로 극단의 공산원리주의, 유교원리주의, 기독근본주의 같은 것이 아닐까.

▼균형잃고 한쪽으로만 치달려▼

살펴보면 근본원리주의의 비극으로 치닫는 것들이 숱하다. 정의와 진리 대신 지역의 눈으로 심판하고 재단하는 ‘지역원리주의’가 우리 목을 옥죈다. 기업인들은 노동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노동원리주의’로 망한다고 탄식이다. 김일성 묘소에 참배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면서 일찌감치 ‘김일성숭배주의자‘로 낙인찍는 반공원리주의는 또 어떤가.

균형을 잃고 끝없이 한쪽으로만 치달리며, 상대방은 없고 나만 존재하는 부조화와 마찰의 극단주의. 분노와 증오의 칼끝으로 ‘네 죄’만 따지다 파멸을 부르는 외곬. 그러나 목표에 다가서고, 칼을 찾으려면 그 어리석은 각주(刻舟) 표시부터 지워야 한다. 눈을 흐리게 하고 본질을 은폐하며, 목표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리근본주의의 껍데기를 치우지 아니하면 안된다. ‘껍데기’는 가라.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