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호남 기피’였다. 이 문제는 사회과학자들의 오랜 쟁점이 되어, 누구는 박정희(朴正熙)의 개발 편중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긴 훈요십조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車峴) 이남과 금강(錦江) 아래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고려사’ 태조 26년 4월 조).
이러한 차별의 근거는 호남이 배산역수(背山逆水·임금이 있는 반대쪽으로 산맥과 물이 달린다)의 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왕건이 남긴 이 유언은 제도적 차별도 정당화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차원에서 호남인들에 대한 편견을 유발했다. 풍토적으로 볼 때 백제의 유산을 받아 이지적이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감적인 호남인들은 이로 인해 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
그런데 이 배산역수의 논리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의혹이 있다. 여러 문헌으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이 정말로 훈요를 남겼는지, 그것이 꼭 10조였는지, 그리고 그 8조에 호남 기피의 조항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훈요십조가 의심을 받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사 태조편 원본 소실▼
첫째,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태조 편에 훈요십조가 기재된 경위에 의혹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노·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黃龍寺)의 중창(重創)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노(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승노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둘째,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남길 만큼 백제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살펴 볼 때, 왕건이 이 훈요 8조대로 호남인들을 관직에서 배제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1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백제를 미워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왕건이 견훤(甄萱)과의 원한 관계로 인해 호남을 미워했을 개연성도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정황을 보면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청주(淸州) 일대의 저항 세력이었지 지금의 호남 세력은 아니었다.
▼왕건 호남인 곁에 두고 중용▼
오히려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와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谷城)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唐津) 사람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거란침입때 현종 되레 전주피난▼
셋째, 고려 왕실이 그토록 호남을 기피했다면 거란의 침입 당시에 현종(顯宗)이 굳이 호남으로 피난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는다. 즉, ‘고려사’(현종 2년 정월 기해 조)에 의하면 거란의 침입 당시 현종이 전주(全州)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건의 훈요십조가 사실이고 또 후손에 대한 훈요십조의 영향력이 그토록 강력했다면 왕은 영남이나 강원도로 피난했어야 옳았지 호남으로 피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훈요십조와 호남 기피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볼 때 금강이나 차령산맥이 개경(開京)에 대해 배산역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를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신라의 젖줄이오 생활 터전이었던 낙동강(洛東江)과 태백산맥이 배산역수이다. 호남의 젖줄인 금강과 차령산맥은 경주(慶州·신라)에 대해 배산역수이지 개경에 대해 배산역수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결국 호남을 배산역수로 본 것은 고려인의 시각이 아니라 신라인의 시각이었다.
금강의 역수론(逆水論)에 대해 이익(李瀷)은 좀더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금강은 반궁수(反弓水), 즉 강의 모습이 마치 개경을 향해 활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기 때문에 흉지(凶地)라는 것이다.(‘성호사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논증이다. 왜냐하면, 개경에 대한 반궁수를 따지자면 턱밑에 있는 한강이 먼저이지 600리나 멀리 떨어진 금강을 거론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를 합리화한 배산역수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한 저술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였다. 그는 8도의 풍물과 인심을 기록하면서 유독 전라도에 대해서만은 악의적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은 반역과 요사(妖邪)와 미신과 재앙의 땅이었다.
▼후대학자들 비판없이 수용▼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밟아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여행이라면 구경거리 많은 호남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설령 여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외갓집이 나주(羅州 吳氏)였기 때문에 한번쯤은 가보았음직한데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그런 글을 썼다.
이중환이 호남 땅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이유는, 그가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제도적 차별 정당화시켜▼
요컨대, 한국 현대사의 아린 상처를 남긴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는 오랜 역사성을 가진 집단 따돌림이었다. 호남 푸대접의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우기로 한다면 그 이전에 이미 호남 출신의 학생이나 신혼 부부들이 타지에서 하숙집이나 전셋집을 얻기 어려웠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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