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번스타인, 솔티 등이 지휘하는 연주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우리는 연주를 단순히 악보나 작곡자의 의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음악은 다르게 연주되고 다르게 반복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차이를 생산하는 연주, 반복하면서 달라지는 연주를 악보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사건으로 볼 수는 없을까?
들뢰즈는 동일성에 대해서 차이를, 같은 것의 단순 반복에 대해서 ‘차이의 반복’을 마주 세운다. 그는 다수를 지배하는 동일성을 덮개를 벗기고 구체적인 것들의 생성, 변화를 차이를 통해서 따라잡으려 한다. 그는 이런 ‘차이의 존재론’으로 전통적인 사고틀을 전복시키려 한다.
요즘 들뢰즈는 영화, 문학, 철학, 문화이론 등에서 중요한 참조틀로 이용된다. 이런 들뢰즈주의자들이 문화의 해석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바디우는 들뢰즈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그는 들뢰즈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과 난해한 텍스트의 표면에 가려진 들뢰즈의 참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들뢰즈 사고의 얼개를 명료하게 정식화하면서 들뢰즈가 제기한 문제를 그 자신에게 되던진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드물게 합리주의와 플라톤주의에 충실한 바디우의 ‘들뢰즈 읽기’는 상이한 사고태도끼리 부딪치는 이론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들뢰즈가 그의 스승들(베르그송, 스피노자, 니체 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의 이론적 적들로 여겼던 플라톤, 헤겔 등에 반대하면서도 그들과 어떤 점을 공유하는지, 들뢰즈의 사고방식이 어떤 난점들에 부딪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바디우는 먼저 들뢰즈의 사유를 ‘일자(一者·One·Un)’의 존재론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천 개의 목소리를 지닌 모든 다수를 위한 하나의 목소리’인 ‘존재의 유일한 함성’을 들려준다. 하지만 이것이 그 소망과 달리 구체적인 것의 다양성을 사고할 수 없다면 얼마나 비극적인가?
바디우는 들뢰즈의 직관적 방법론을 비롯한 중요한 사고 마디들을 철저하게 재검토한다. 그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대립, 시간과 진리의 대립, 영원회귀와 우연의 대립, 외부와 주름의 대립을 통해서 들뢰즈가 사건, 진리, 행위, 주체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제시하고, 어떤 난점을 드러내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사고틀을 현재의 프랑스 철학과 철학의 역사 안에서 자리매김 한다.
이제 ‘포스트 모던’ 철학자인 들뢰즈가 아니라 플라톤과 하이데거가 던진 ‘존재 물음’에 답하는 들뢰즈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바디우는 우리에게는 어떤 질문을 던질까? 들뢰즈를 존경할 것인가? 그의 문제와 대결할 것인가? 우리 나름의 사고틀을 마련할 것인가?
어쨌든 ‘바디우 읽기’가 우리 사고 태도를 가다듬게 하고 우리 문제를 사고하도록 떠미는 ‘사건’이 되었으면 한다. 양 운 덕
양운덕(고려대 강사·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