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병종/나무 한그루

  • 입력 2001년 6월 29일 18시 33분


서울 도심 아파트에 살다보면 잃는 게 많다. 교통이 편하다는 이점은 있겠지만 우선 소음공해가 보통이 아니다. 차 소리 때문에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할 정도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 베란다 문을 열다 필자는 문득 한 그루의 나무를 ‘발견’했다. 아파트 뒷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다. 그러고 보니 해마다 유월이면 바로 그 나무를 ‘새로’ 발견하곤 했던 것 같다.

▷나무는 올해도 어김없이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열매를 달고 있다. 누가 언제 거기에 심어 놓았는지 모르나 3층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나무는 어른 눈높이까지 가지가 뻗어 올라와 있다. 탁한 공기며 소음 따위에도 아랑곳없이, 뻗어 올라온 가지마다 손만 뻗으면 만져질 거리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사과 열매를 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새벽이면 어김없이 베란다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십년 만의 가뭄으로 시작된 올 여름은 유난히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 하나 기쁨이 될 만한 일이 없다. 신문이나 TV에선 검은 구름처럼 우울한 소식들만 가득하다. 이런 속에서 새벽과 저녁이면 일부러 베란다로 나가 사과나무를 보곤 한다. 물주고 거름 주어 보살피는 이 없건만 저 홀로 메마른 땅을 뚫고 장하게 커 올라 아름답고 싱싱한 열매를 달고 있는 그 나무를 볼라치면 생명의 감동이 잔잔히 전해진다. ‘그래, 저 나무처럼 살아야지’라는 다짐도 해본다. 때때로 그 나무가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신의 메시지 같다는 느낌도 든다.

▷오래 전 대학의 연구실이 지하에 있었을 때, 그 연구실 앞에도 유월이면 이름 모를 열매가 열리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최루탄의 검은 연기가 하늘을 메우고 도서관 쪽으로부터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젊은 함성이 들려오곤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사회가 누란의 극과 극을 치닫던 그 시절에도 나무는 용케 자라 초록색 열매를 맺곤 했던 것이다. 지금은 정말로 여러모로 어렵고 힘든 시절이다. 도시 공간에는 못할지언정 메마르고 삭막한 ‘가슴’마다에 푸른 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보는 여유를 가져봤으면 한다.

김병종 객원논설위원(화가·서울대 교수)kimb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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