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다면 성장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가출이지 여행이 아니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세 명의 여학생과 한 명의 교사는 ‘과거’와 결별한 후 ‘집’으로 돌아온다. 시간은 흘렀고, 집은 건재하다. 하지만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변했다.
교사에서 학생까지, 모범생에서 열등생까지 모든 사람에게 학교 곧 사회는 ‘종합병동’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아프다. 아프지 않기 위해 그들은 의사도 없는 그 병원에서의 탈출을 감행한다. ‘탈옥 영화’에서처럼 멋있게 학교 담장을 넘고, ‘로드 무비’에서처럼 험난한 길을 떠나며, 두 명은 아니지만 ‘버디 무비’에서처럼 동지애를 확인하기도 한다. ‘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제목 속의 ‘영화’라는 단어는, 때문에 ‘영상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환상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학교를 감옥으로 보는 이 소설이 푸코식의 주제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성란이 문제삼는 것은 학교를 감옥으로 만드는 규율과 통제, 그리고 그것의 내면화로 인한 자발적 복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학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거나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극적인 탈출이기보다는 소극적인 도망, 창조적인 운동이기보다는 충동적인 방황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교 1등이지만 불치병에 걸린 한 명의 여학생은 아마도 그 병이 아니었다면 학교 안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나머지 두 명의 학생도 결코 학교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돌아가서 반성문 쓸 걱정을 하니까.
슈퍼맨이 되기를 바랐던 교사도 ‘안락한 수족관’이었던 학교를 다시 그리워한다. 이런 귀교(歸校) 본능이 이들의 탈주를 현실적으로 만들어준다. 온전한 탈주조차 불가능한 현실의 벽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非劇的)인 요소가 이 소설을 더욱 비극(悲劇)으로 만든다.
하지만 하성란이 놓친 부분이 있다. 진정한 탈주는 ‘여행’이 아니라 ‘유목’이라는 사실이다. 여행은 집과 길의 이분법을 유지한다. 집은 집이고 길은 길이다. 그러나 탈주는 집을 길로 만들거나 길을 집으로 만들어야 가능하다. 집이 길이고 길이 집이다. 세상 자체가 움직이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여기’가 ‘거기’다.
그런데 하성란은 유목이 아닌 여행을 행함으로써 그 벽을 허물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또다른 벽 속의 벽돌이 될지라도 지금의 벽을 허무는 데에 있다. 그래야 경계가 넓어지고 자유는 확대된다.
흔히 ‘마이크로 묘사’로 대변되었던 이 작가의 치밀한 묘사 능력이나 건조한 시선이 이 소설에서 강화된 서사 때문에 약화된 것도 아쉽다. 서사와 묘사는 대립 개념이 아니라 보완 개념일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다. 그녀 소설의 특장이었던 문장의 밀도와 충격적인 반전이 감소됨으로써 그녀만의 독특한 아우라 또한 상실되었다.
‘길 없는 길’이 아닌 ‘정해진 길’을 감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지금 이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변화가 아니라 개성의 변용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너무나 소중한 이 작가의 이 작품이 아닌 다음 작품을 위해서라도.
김미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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