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출연 거부는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도권을 행사해온 방송사가 연예인들의 높아진 위상에 따라 ‘파워’면에서 밀리고 있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과거 방송사 PD들은 연예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연예인들 쪽으로 급속히 힘이 옮겨가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
요즘 방송국 PD들은 스타급 연예인들을 서로 자기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기 위해 갖은 공을 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방송국들은 시청률을 위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연예인을 ‘모셔올’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우위에 서게 된 연예인들이나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프로그램을 골라가며 출연하는 등 큰 소리를 치는 형국이다.
연예계 파워의 급성장을 대변하는 것은 지난해부터 기업화하면서 ‘스타 왕국’을 형성하고 있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업체들.
가수 출신인 이수만씨가 대주주로 있는 SM 엔터테인먼트는 대표상품이었던 ‘H.O.T.’이외에 ‘S.E.S.’ ‘신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를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이들을 통해 강력한 대중문화 파워를 형성했다.
도레미미디어는 조성모 김건모 등의 음반을 유통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큰 음반사중 하나. 연내 코스닥 등록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 위성 음악방송인 ‘채널 V 코리아’를 설립해 스스로 방송국을 거느릴 만큼 국내 ‘연예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영AV는 박진영 박지윤 ‘핑클’ 등의 소속사로 최근 케이블 음악 채널 KMTV를 인수했으며 이정현이 소속돼 있는 ‘예당 엔터테인먼트’도 연내 위성방송 및 영화 제작 등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도약한다는 전략을 꾀하고 있다.
이밖에 ‘god’의 소속사인 ‘싸이더스’나 신승훈이 소속돼 있는 ‘아이스타 뮤직’, 이영애 안재욱 송윤아 등 톱 탤런트들을 거느리고 있는 ‘에이스타스’ 등도 영역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또 임창정과 ‘UN’의 소속사인 천일음반과 ‘샤크라’ ‘디바’의 잼엔터테인먼트, ‘코요태’의 ‘윈섬 미디어’ 등 3개 업체는 최근 통합을 선언하는 등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더 큰 파워를 갖기 위해 합종연횡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싸이더스’의 정해익 이사는 “여러 스타들을 거느리고 있어 아쉬운 쪽은 우리들이 아니라 방송사들”이라며 “더 이상 방송사에 저자세로 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이들 업체들은 소속 스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부터 개입하거나 신인을 끼워 출연시키기도 한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매체 파워가 예전 같지 않음을 절감하고 있다. 특히 위성방송 케이블TV 등 다매체 시대를 맞아 지상파TV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것.
외국에서도 홍콩의 경우 위성방송인 ‘스타 TV’가 등장하기 전엔 지상파 방송이 연예인 인터뷰 일정까지 간섭했으나 요즘은 파워가 약화돼 여러 방송국 중 하나일 뿐이다. 일본에서도 엔터테인먼트 업체가 방송사의 주주로 참여하는 일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 매체 영향력 변화는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가요 매니저들 사이에서 케이블 TV 음악채널인 m.net와 KMTV는 ‘필수 매체’로 각광받고 있다. 뮤직비디오를 흥행 전략으로 내세운 가수들은 오히려 하루 종일 음악 방송만을 내보내는 이들 채널을 지상파 방송만큼 선호한다.
매니저들이 MBC를 상대로 출연 거부에 돌입한 것은 이같은 역학관계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 연제협은 “방송사, 연예인과 함께 매니저들이 연예 산업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현실인데도 방송사는 여전히 우리를 깔보고 있다”며 “이는 결국 시대 변화를 외면하는 것으로 피해를 보는 쪽은 MBC가 될 것”이라며 여유있는 자세다.
KBS의 한 PD는 “MBC 출연거부 사태는 연예 산업의 바람직한 위상 정립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갈 일이 터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허엽·이승헌기자>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