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50년결산 윤복희 "연기없는 노래는 체질에 안맞아"

  • 입력 2001년 8월 2일 18시 55분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윤복희(55)는 가벼운 투정부터 했다. 인터뷰 약속을 서둘러 잡은 탓. 그는 “한 달만에 모처럼 스케줄이 비어 집 청소를 하려는데 아쉽다”고 했다. 사진 기자를 보고는 “화장도 안 했다”며 주머니에서 꺼내는 게 립 그로스 하나가 전부. 짧은 ‘화장’을 마친 뒤 “어떤 포즈가 좋을까”라며 사뿐사뿐 떼는 걸음걸이가 이미 50년 무대 관록이 진하게 풍겨진다.

거의 평생을 화려한 ‘분장’속에 살아온 그가 보여준 중년의 현재형은 생경함마저 들었다. 그는 “1976년 이후 신앙을 접하고부터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요즘은 거울도 안 본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정식집. 자신이 살고 있는 S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으로 오후 4시경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우선 ‘생활인’ 윤복희가 궁금했다.

“꽤 오래된 아파트여서 재건축 바람 타고 집 값이 뛰었겠어요.”

그는 “재건축 때문에 귀찮아 이사가려 했는데 20년 넘은 이웃 사촌들이 만류해 그대로 살기로 했다”며 “그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맨 꼭대기의 가장자리 집을 주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분양 당시보다 수십 배 뛴 집 값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와 절친한 가수 조영남의 전언. “윤복희 씨의 집에 가봤더니 수도승처럼 살고 있었다. 집은 절간 같았다. 연예인의 방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단순했다. 아니 담백했다. 한 구석에 콩나물값 800원, 택시비 5000원 등의 명세서가 빼곡했는데 눈물이 났다.”

윤복희는 요즘 무대인생 50년을 결산하는 음반과 순회 공연 ‘꾼’을 준비 중이다. 음반은 이 달말 발표하고 공연은 9월3,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출발해 부산 광주 뉴욕 워싱톤 등을 순회한다.

윤복희는 6월 중순 기자회견에서 “‘꾼’ 공연과 음반을 끝으로 가수로서 은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진의가 궁금했다.

-윤 선생은 자서전 ‘딴따라’에서 ‘무대는 밥이자 침대였고 부모이자 선생님이었다’고 말했는데요.

“무대 인생을 마감하는 게 아니고 대중 가수로서의 은퇴입니다. (은퇴라고 하는데 멈칫거렸다. 적확한 단어가 아닌 듯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저는 체질상 대중 가수가 어울리지 않아요. 연기나 스토리 없이 노래만 하는 게 힘들고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게다가 저는 공식적인 독집 음반을 낸 적이 없어요.”

50년 결산 음반은 윤복희로서는 첫 공식 솔로 음반이다. 은퇴한다면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음반이 되는 셈. 1967년 데뷔곡 ‘웃는 얼굴 다정해도’는 MBC 라이브 방송을 녹음한 것이고 1979년의 히트곡 ‘여러분’은 서울 국제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노래다.

-많은 이들은 윤복희를 뮤지컬 배우보다 가수로 기억합니다. 70년대 중반 이후 윤 선생의 뮤지컬 인생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지 않은 셈인데 서운하지 않으세요.

“다른 가수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고맙게 여깁니다. 음반이 하나도 없는 내가 50년 간 가수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조영남씨보다 히트곡이 하나는 더 있을걸요(웃음). 허지만 사람들이 ‘왜 요즘엔 활동을 안 하냐’고 물어오면 서운해요. 그동안 저는 1년에 뮤지컬을 네 편이나 했어요. ‘꾼’ 음반과 공연에서 이런 것들을 알릴 참입니다.”

-뮤지컬 배우보다 가수의 길이 더 편안했을 텐데요.

“평생 뮤지컬과 가수가 분리되지 않는 무대 인생을 살았어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윤부길)의 ‘부길부길쇼’ 무대에 서면서부터 노래 창 안무 연기 스토리를 한 몸에 담아내는 게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중 일부에 불과한 ‘노래’만 떼어내 활동하라면 내 예혼(藝魂)이 조각날 것 같아요.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에서 오랫동안 가수로서 활동한 이후 나머지 무대 인생의 절반을 뮤지컬에 ‘귀의’한 것은 숙명입니다.”

들을수록 50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음반을 낸다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꾼’프로젝트는 음반과 공연 외에 두 장의 고스펠 음반을 포함해 모두 14억 원이 들어가는 대형 기획. 쉰이 넘은 데다 공식 가수의 활동도 20년 넘게 중단한 그에게 이만한 투자는 차라리 모험이다.

주관 기획사 ‘글로벌 컬처’의 박종홍 사장에게 “손익분기점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 대중 예술계에 한 획을 그은 예인(藝人)에 대한 기념비로서 음반과 공연의 가치가 충분하다”며 “경영상의 문제점을 짚어봤으나 진행에 무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윤복희는 “내가 그럴만한 상품 가치가 남아 있는지도 잘 모르는 데다 무대 수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걱정”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컬처’는 50년 기념음반을 1만장 한정 판매한다. 18일 그 시리얼 넘버 1호 음반을 인터넷 경매에 붙인 결과, 60대 여성이 586만원에 낙찰했다. 현재 음반 예약자는 2000여명에 이른다.

음반에는 대부분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로 ‘끼’ ‘우리는 광대’ ‘삶’ ‘사랑해요’ ‘서풍’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윤복희는 “한국 대중음악의 방향을 실험적으로 제시해본 노래로 10여 년 전 만들었던 노래인데 박 사장을 만나 빛을 보게 됐다”고 말한다.

-아직 음반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 열기면 은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감(?)이 들어요. 녹음한 노래를 들어봤더니 새로운 모티브가 자꾸 떠오르고 내년에 뭔가를 또 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내 노래는 늘 대중들에게 어려웠는데….”

이야기의 시계 바늘을 50년 전으로 돌렸다. 6·25 전쟁 중에 섰던 첫 무대, 부모와의 유랑극단 생활, 62년 내한한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연, 열여덟의 나이에 걸 그룹 ‘코리언 키튼스’(한국의 새끼 고양이들)를 이끌며 런던과 라스베이거스 등 세계적인 쇼 무대를 누빈 이력, 우연히 주역이 돼 버린 한국 미니스커트 열풍,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등.

-혼자사는 게 외롭지 않으세요?

“외로움은 사치예요. 대본 쓰고 노래 만들고 안무 구상하고 머리 끄적이다 보면 금세 날이 밝아요. ….(한참 뒤) 사생활은 그냥 넘어가죠.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도 있고, 당사자와 그들의 자식들도 다 컸는데. 특히 내가 도와주는 청소년들에게 내 과거로 실망을 주기 싫어요.”

기자 직업의 속성을 이해해달라고 했더니 윤복희는 “묻는 말에야 솔직하게 대답하겠지만 사생활이 신문 독자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가지만 더 묻겠다고 했다.

-자식을 안 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에 관한 한 큰 죄를 지었어요. 라스베이거스 활동 계약서에 임신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그래서 결혼한 뒤 아이를 지운 적이 있었어요.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으로 피임 방법도 몰랐어요. 이제 그 일은 아무리 회개해도 모자라요.”

눈가가 붉어졌다. 괜히 물었다 싶었다. 사실 윤복희는 1997년 낸 신앙 자서전 ‘딴따라’에서 사사로운 이야기까지 거의 모두를 고백했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1967년 미니스커트 열풍을 물어봤다.

-국내 미니스커트를 처음으로 도입한 여성으로 한국 패션사에 빠질 수 없는 기록이 있는데요.

“당시 미니스커트는 애인(첫 남편인 가수 유주용)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입었어요. 해외 활동으로 4년을 떨어져 있다가 겨우 2주 휴가 받아 왔는데 내 맘이 어떻겠어요. 한 남자를 위한 사랑의 도발이었는데 그게 한국 전체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어요.”

그는 그때 2주 휴가를 받아 귀국했다. (비행기 트랩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내려오는 사진은 당시의 것이 아니다. 그는 새벽 2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아무도 그의 귀국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애인의 사랑을 확인한 뒤 리사이틀 무대에서 약혼을 함께 발표했다. 휴가 일정을 넘겨 미국 TV의 ‘애드 설리번 쇼’를 펑크냈으나 예비 신부의 눈엔 면사포만 보였다.

윤복희는 1976년 교통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진 뒤 신앙에 몰입했다. 1979년 ‘여러분’이 히트했으나 그의 열정을 사로잡은 것은 ‘빠담빠담빠담’ ‘피터 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 등 뮤지컬. 지금까지 50여 편의 뮤지컬을 출연한 그는 한국 뮤지컬계의 대모다.

“뮤지컬은 토털 아트입니다. 메시지를 종합해 전달할 수 있어요. 어릴 때 섰던 가극의 무대로 되돌아가는 셈이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나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건강은 시력이 떨어진 것 빼고는 괜찮은 편이다. 1986년 ‘피터 팬’ 공연 때 무대 세트가 무너져 목을 다친 후유증으로 눈이 잘 안 보인다. 그는 “사물이 흐릿하긴 하지만 그래서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며 웃는다.

괴롭거나 여유가 있으면 가까운 해외로 나가 ‘바다 수영’을 한다. 그는 늘 인생의 고비마다 헤엄쳐 더 높이 오르는 재주가 있었다고 말한다. 수영복은 아직 비키니.

“몸에 많이 붙는 옷을 못 입어요. 그 습관 때문에 배 가린 수영복은 못 입어요.”

◈윤복희씨는…

△1946년 3월 9일생.

△7세 때 서울 명동 시공관 무대에서 처음 노래를 부르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른 채 한양여고 2 년에 편입, 서라벌 예대 무용과 중퇴.

△1962년 봄 워커힐 극장 개관공연에서 루 이 암스트롱과 공연. 당시 미8군 무대에 서 루이 암스트롱 흉내로 인기.

△1963년 필리핀 마닐라 공연 갔다가 사기 당함. 여비를 위해 ‘코리언 키튼스’ 결 성해 동남아에서 활동.

△1964년 영국 ‘BBC 투나잇 쇼’ 출연.

△1965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진출.

△1966년 봅 호프와 함께 베트남전 미군 위문 공연.

△1967년 1월 귀국. 미니스커트 바람. ‘웃 는 얼굴 다정해도’로 데뷔.

△1968년 유주용과 결혼. 4년 뒤 결별.

△1976년 개신교에 귀의. 극단 현대극장 단원.

△1977년 남진과 결혼. 2년 후 결별.

△1979년 ‘여러분’ 히트.

△1981년 ‘나는 당신을’로 하와이 국제 가 요제 대상 수상.

△1977년 ‘빠담 빠담 빠담’ 이후 ‘용이 나 리샤’ ‘장보고’ ‘사운드 오브 뮤직’ ‘지 저스 크라이스타 슈퍼스타’ ‘캐츠’ 등 뮤지컬에 출연.

◈知人들이 보는 윤복희

▽조영남(가수)〓그는 무대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당차게도 보였다. 청와대 초청 무대에서 그는 ‘여러분’을 부르며 대통령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순간 주위가 썰렁해졌다. 대통령에게 손가락질한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이 썰렁해진 이유를 몰랐다. 미니스커트 바람은 충격적이었다. 윤복희의 각선미는 최고였다. 무릎 없이 빚어낸 조각 같았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술인으로서 단조롭게 사는 것 같아 아쉽다.

▽이남기(SBS 보도본부장)〓천재적이었다. 그와 함께 공연을 기획하면 막힘이 없었다. 아이디어도 많고 성실했으며 함께 공연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도 컸다. 집이 매우 단촐했던 게 인상에 남는다. 젊었을 때 성격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80년대 초반 방송 녹화 때 가사를 고쳐달라는 주문에 마이크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한익평(안무 연출가)〓2000년 내가 연출한 뮤지컬 ‘올 댓 재즈’에서 전반적인 호스트 역할을 했다. 뮤지컬계에서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그는 한국 뮤지컬의 개척자이고 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영어를 잘 하는데다 해외 활동 덕분에 뮤지컬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은퇴를 운운한 게 혹시 나이 때문은 아닌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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