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金壽煥·사진) 추기경은 12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교리신학원에서 사제 수품 50주년(15일)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 추기경이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한 이후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가진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른바 ‘언론개혁’과 관련한 세무조사 등 정부 주도의 언론개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이같이 완곡히 표현했다.
김 추기경은 또 전날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전쟁과 같은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국론분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화 시대를 맞아 나라와 나라는 가까워졌지만 나라간의 선의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민의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구한말 서로 다투다 일본에 강점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정치적으로 힘을 모으는 쪽보다 흐트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여야 간의 싸움이 아니고, 또 말뿐인 영수회담도 아니고, 정치지도자들이 진지하게 만나 깊이 얘기하고 협력하고 양보하는 것입니다.”
-8·15 방북단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어떻게 보십니까?
“어떤 분들이 통일을 바라고, 북한 동포를 만나 너무 좋은 나머지 정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온 것은 아니니까, 또 북한이 이것 때문에 토라져 남북대화가 잘 안 될 수도 있으니까 화합하는 쪽으로 방법을 찾았으면 합니다.”
-미국을 강타한 테러사건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전날 저녁에 뉴스를 보지 못하고 잠들어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큰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염려되는 것은 미국이 강경 대응으로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제발 더 큰 불행, 다시 말하면 전쟁으로까지 확대시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제생활 50년 동안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70, 80년대 군사정권시절 중정(중앙정보부)쪽은 브레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할 때 저는 누구하고 의논할 사람도 없이 혼자서 결정하고 대처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양심과 대화하는 것이었어요.”
-가장 아쉬운 일과 보람 있었던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늘 소외된 사람과 같이 있고 싶었는데 결국은 같이 먹고 자는 것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그러는 사이 마산교구 주교가 되고 서울교구 대주교로 올라오게 돼 점점 더 그들과 멀어지게 됐지요. 50년 전 처음 사제서품을 받을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면 하느님 앞에 자랑할 것보다 용서를 구해야할 일이 훨씬 많아요. 신부가 되자마자 안동 본당과 김천 본당에서 신자들과 직접 접촉하며 일한 2년 간의 세월이 가장 보람찼고,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후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맡게 되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식을 통신으로 받아 직접 번역해 보도하면서 밥 먹는 시간까지도 아깝게 느꼈던 일이 기억납니다.”
김 추기경은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마다 150만명의 태아가 낙태로 죽어갑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유아수출국입니다. 우리 아이를 우리가 죽이고 우리 아이를 우리가 버렸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화’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노인을 모시는 일로 서로 싸우고 노인을 폐가에 갖다 버리는 일을 여러분이 당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면 바로 그 대가를 우리가 치르게 됩니다.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관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인간존중입니다.”
김 추기경의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미사는 14일 오전 10시반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